2000년대 이후 한국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을 놓고 벌어진 논쟁은 점차 ‘숫자’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이 통계에 입각한 실증적 연구 성과를 식민지근대화론의 근거로 내세우면서부터다. 국내총생산(GDP), 1인당 생산, 소득, 투자 등 복잡 다양한 국민경제 관련 지표들, 이른바 ‘국민계정’이 근대기의 시대상을 읽는 도구로 떠오른 것이다.
낙성대연구소는 이런 식민지시대 통계에 입각해 실증적인 경제사학을 추구해온 연구집단이다. 이 연구소 학자들이 1911년부터 2010년까지 국민계정의 장기 통계를 집적한 결과물인 <한국의 장기통계-국민계정 1911~2010>(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을 펴냈다. 1911~45년 식민지 시기 국민계정만 다뤘던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2006)를 개정·증보한 내용이다. 새 연구 성과는 식민지 시기뿐 아니라 한국 근현대 경제사 100년을 국민계정이라는 시스템으로 처음 포괄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어 보인다.
낙성대연구소 소장으로 국민계정 추계 연구를 진두지휘해온 김낙년 동국대 교수(경제학)를 12일 서울 장충동 연구실에서 만났다. 그는 “국외에서도 인정받는 연구 성과인데, 국내에서는 너무 관심을 받지 못한다”며 웃었다.
“현재 세계 각국 경제통계는 국제연합(UN)이 내는 ‘국민계정 체계’(SNA)를 따릅니다. 이 체계 안에 있는 한, 각 나라의 공간적·시대적 비교 등이 가능한데, 이 체계에 포함되지 않는 시기는 다른 하위 자료들을 참조해 추계해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장기 경제통계를 추계하는 대표적 작업으로는 일본 히토쓰바시대학 경제연구소에서 주도해온 ‘미조구치’ 통계가 꼽혀왔지만, 최근엔 낙성대연구소의 추계 결과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설명이다. 미조구치 통계의 오류들을 바로잡은 이 연구소의 추계 결과가 전세계 경제통계를 망라한 ‘매디슨’ 통계에서도 미조구치 통계와 나란히 제시될 만큼 주목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에 나온 새 연구성과는 추계 결과를 기존 국민계정 체계와 연결지어, 100년간 장기 경제흐름을 읽을 수 있도록 한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고 했다. 우선 남북한 통계를 나누기 위해 해방 전 국내총생산 통계를 도별로 분할했고, 현행 국민계정 체계와 다른 식민지 시기와 1953~1969년 국민계정 통계를 현행 기준에 맞춰 개편했다. 또 원자료가 없다시피 한 해방 전후기 인구와 생산지수를 추계해 넣었다. 이렇게 완성된 장기 추이를 보면, 1인당 국내총생산은 해방 전 1941년 정점을 찍었다가 붕괴됐고 그 뒤 1969년에야 다시 정점 수준으로 회복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책에서도 식민지 시기 근대적 경제성장이 있었다는 연구소 쪽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1911~1945년 한반도에선 인구가 해마다 1.3%씩 증가하고 1인당 생산이 해마다 2.3% 늘어나, 30년 가까이 ‘근대적 경제성장’이 지속됐다는 견해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부터 이를 놓고 논쟁해온 허수열 충남대 교수(경제학)는, 구조적 불평등을 고려하면 조선인 입장에서 식민지 시기 경제성장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으며, 오히려 식민지 경제구조가 해소된 해방 뒤 근대적 경제성장이 일어났다고 본다. 연구소 쪽에서 추계한 1910년대 통계의 경우 인구증가율은 낮게 잡고 국내총생산 증가율은 높게 잡아 전체적으로 과대평가됐으며, 원자료를 신뢰하기 어려운 식민지 초창기의 경제지표를 너무 낮게 잡아 그 뒤 성장률이 높은 것처럼 보이는 착시가 빚어졌다는 주장이다. 이에 김 교수는 “우량품종 도입에 따른 쌀 수확량 증가 등은 조선총독부에서도 이미 1918년 토지조사사업 뒤 한 차례 수정한 바 있다”며 원자료 중 충실한 부분은 인정해줘야 한다고 반박했다.
또 허 교수는 1940~45년 전쟁으로 식민지 경제가 무너져내린 현상을 두고 “일시적인 경제적 변화가 있었어도 결국 신기루처럼 사라진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김 교수는 “시스템 붕괴기라 해도 근대적 제도 등이 모두 사라졌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맞서고 있다. 허 교수는 해방 전후를 ‘단절’로, 김 교수는 ‘연속’으로 파악한 셈이다.
김 교수는 “식민 지배는 그 자체로 정당화될 수 없다. 경제변화가 사람들 삶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자는 입장이 ‘식민지수혜론’으로 매도되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고 했다. 연구소가 성장에만 초점을 두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교육·인구·사법 등 비경제 분야에도 ‘사회통계’ 같은 것을 만들고, ‘한국의 장기통계’로 집대성하는 작업을 추진중”이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최근 언론에서 주목받은 소득분배 연구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뤄졌다고 그는 덧붙였다.
글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