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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장발장의 위대한 인간선언

등록 2013-02-01 20:13수정 2015-11-03 00:41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레 미제라블 1~5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민음사·각 권 1만2000~1만3000원

어느 날 경비원 아저씨 한 분을 인터뷰했다. 그 아저씨는 수년 동안 한 달에 2만원가량 기부를 해서 국무총리상을 타게 되었는데 정작 시상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우리(<시비에스> ‘김미화의 여러분’ 제작팀)는 그 아저씨에게 전화를 했다. “아저씨! 그날 근무 바꿔 줄 사람이 없어서 시상식에 못 가신 거예요?”

그랬더니 아저씨는 한사코 그건 상을 탈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띄엄띄엄 어눌하게 이어졌던 아저씨의 말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좁디좁은 경비실에 앉아서 이 방법 말고 어떻게 우주를 꿈꾸겠어요? 어떻게 우주의 한 귀퉁이에 사는 사람으로서 기여를 할 수 있겠어요?”

‘이 좁은 곳에 앉아서 어떻게 우주를 꿈꾸나?’란 말을 들은 날 나는 <레 미제라블> 생각을 했다. <레 미제라블>의 바리케이드 시가전 장면에서 바리케이드 안의 사람들은 완전히 고립되었고 새벽이 밝아오면 곧 모두 죽을 것이었다. 그런데 여차여차해서 네명만은 무사히 살아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다들 내가 나가겠다고 아우성을 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야기는 정반대로 진행되었다. 모두 자신이 죽겠다고, 기왕 죽을 거면 훌륭한 죽음을 맞고 싶다고 말한다. 모두 내가 아니라 당신이 살아나가야 한다고, 당신은 아내가 누이가 아이가 있지 않으냐고 우긴다. 그들은 인류를 위해서 한 개인에 불과한 자신의 목숨을 순수한 선물로 바치려 한다. 그런데 빅토르 위고가 그 장면을 하도 천연덕스럽고 태연하게 써 버렸기 때문에 나 역시 뜨거워지고 숭고해져 버렸다.

일상에 매여 살면서 인간성에 대한 별다른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고 살 때조차 우리는 어떤 믿음에 은밀히, 그러나 한사코 매달린다. 우리에겐 모두 완전히 포기할 수 없는 믿음들이 있다. 경비원 아저씨가 좁은 경비실에 앉아서 우주를 꿈꿨듯 나도 침대에서 <레 미제라블>을 읽으면서 포기하려 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위대한 인류에 대한 믿음에 가까이 가 볼 수 있었다. 결국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우리가 살고 있는 것보다 더 높은 현실에 매달려야 하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레 미제라블>을 읽으면서 한가지 더 생각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레 미제라블’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가? 위고는 매춘부, 억울한 도둑, 굶주린 하층민 계급에 대해서만 말하려 했던가? 공원에 며칠째 굶주린 어린 두 형제가 있다. 그곳에 자기 삶은 올바르다는 확신에 가득 찬 중산층 시민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온다. 아들 손에는 빵이 있다. 배가 부른 아들은 호수의 백조들에게 빵을 던져준다. 그리고 이 부자가 사라지자 형은 동생을 위해 호수에서 물에 젖은 빵을 건져내 두 조각으로 나누고 큰 것은 동생에게 주고 작은 것은 자기가 먹는다. 이 부분 바로 앞에 위고가 쓴 말들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다른 인간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들, 평화스럽고 무자비하게 만족한 사람들, 자기들이 불쌍한 사람이란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는 사람들, 울지 않는 사람들을 찬미하라. 그리고 불쌍히 여겨라!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그런데 장발장도 자신에 대해서 나는 불쌍한 사람이란 말을 사용한다. 단 한 경우에만 사용한다. 그건 억울한 옥살이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건 오로지 양심과 관련된 이야기다. 코앞에 다가온 행복조차 오로지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포기할 때 그는 “나는 레 미제라블이에요!”라고 말한다. 여기서 레 미제라블의 의미가 바뀌어 버린다. 그들은 단지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진리와 정의, 양심을 버리지 않는다. 빵 한 쪽을 나눠 더 큰 반쪽을 동생에게 주는 형, 비참함 속에서 양심을 지키는 장발장이 바로 레 미제라블이다. 나는 레 미제라블이에요! 이 말은 위대한 인간선언인 것이다.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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