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가나다라 출판사 사재기하는 거 꼬리를 밟고 출판인회의에서 경고를 한 모양인데 적반하장 화를 내더라는군. 나는 정말 지금도 궁금해. 그렇게 해서 베스트셀러 만들면 남긴 하는 거야? 또 그렇게 해서 많이 팔면 기쁘긴 할까? 요즘 말로 그거 영혼을 파는 거 아냐?”
경영난으로 12년 동안 운영하던 사회과학서 전문 출판사의 문을 닫게 된 박 대표가 소주잔을 비우며 내뱉은 말이다. 이정서 ‘수비니겨 출판사’ 대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에도 대형 도서 유통 총판 하나가 부도나 많은 출판사들이 돈을 못 받게 돼 휘청거렸다. 이후 이 대표는 도매상들과 현금 거래만을 하려 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책은 안 팔리고 베스트셀러가 된 책만 팔리는 세상, 두 출판인이 마시는 소주는 쓰디쓰다.
소설 <출판 24시>의 한 장면이다. 이 소설은 출판사 대표, 편집자, 마케터, 신인 작가 등의 인물을 통해 출판계의 ‘오늘’을 생생히 보여준다. 모두 실제 그 일을 하는 이들이 썼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소설의 기획을 한 이대식(48) 새움출판사 대표는 “관행처럼 반복되는 사재기 범죄, 대형 인터넷 서점과의 갑을관계 등 현실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위해 출판사 식구들에게 직접 우리 이야기를 써보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새움출판사의 김화영(27) 편집장, 최하나(29) 편집팀장, 나은심(25) 전자책 편집자, 윤여민(28) 마케터, 그리고 신인작가 장현도(30)씨까지 연작 소설 쓰기에 나섰다. 지난달 27일 <한겨레> 인터뷰를 핑계로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소설 속 인물들이 툭 튀어나온 듯 신기하고 재밌다. 이들은 지난해 11월부터 올 4월까지 매주 돌아가며 자신의 ‘아바타’가 주인공인 소설을 써서 출판사 블로그에 올렸다. 그리고 이를 묶어 책으로 냈다.
소설은 ‘수비니겨 출판사’가 ‘장현기’라는 무명의 작가로부터 투고를 받아 이를 <트레이더>라는 제목의 소설책으로 출간하기까지를 담았다. 그 과정에서 무명씨들의 투고는커녕 교정 중인 원고를 챙길 시간도 부족한 편집자의 하루, 유명 작가의 책 아니면 ‘안 팔리는 책’으로 보여 영업하기 괴로운 마케터의 심정, 전망이 불확실한 전자책 시장에 대비해야 하는 편집자의 애매한 작업환경 등이 ‘육성’으로 드러난다. 실제 투고를 통해 소설가가 된 장현도 작가는 “인세 등 계약 조건부터 판매 부수까지 정확한 수치가 공개됐지만 그게 이 소설의 매력이자 가치”라며 “나처럼 처음 출판의 세계에 들어서는 신인작가들에게도 추천해 줄 책”이라고 말했다.
책에는 수비니겨 출판사를 ‘먹여 살리는 책’인 김진명 작가의 <고구려> 5편의 원고가 빨리 들어오지 않아 초조해하고 급기야 작가를 원망하는 대목이 여러 번 나온다. 실제 새움출판사는 이 소설의 발간 즈음에 <고구려> 5편을 내놓았다. 이쯤 되면 수비니겨와 새움 사이에는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하다. 지은이들도 특별히 이를 구분하고자 하지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멋진 직업’으로서의 출판인이 아닌 현실 속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늘 남의 글만 보다가 자기 글을 써서 즐거웠을까. 최하나 편집팀장은 처음 소설 기획을 들었을 때 “일이 늘었구나 싶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런데도 별 불평 없이 책 작업을 마친 데는 각자 “남자친구 만날 시간도 없이 원고에 묻혀 살고”, “눈도 안 마주쳐주는 인터넷 서점 엠디(MD) 앞에 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작가 약력 잘못 썼다가 책을 전부 폐기처분할 위기에 놓이는”데도 하루하루 열심히 책을 만들어 서점에 내놓는 자신들을 응원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웃으며 인터뷰를 마치려는데 이대식 대표가 한마디 했다. “반응 좋으면 2권이 나올지도 모르죠.” 직원들이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아니요!” 이렇게 출판사는 오늘도 돌아간다.
글·사진 임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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