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한(43)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1980 대중봉기…’ 펴낸 김정한 교수
사회운동 퇴조하며 광주 잊혀져
광주항쟁 지향은 자유민주주의
5·18 부정은 헌정 부인하는 꼴 “언제부터인가 5·18 광주항쟁은 서서히 잊혀지고 있었습니다. 그 망각의 이면에는 전반적인 사회운동의 무력화와 퇴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광주항쟁에 대한 연구서 <1980 대중봉기의 민주주의>(소명출판)를 펴낸 김정한(43·사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정치학)는 20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새로운 사회운동이 활성화되고, 진보의 재구성이 이루어져야 5·18이 새롭게 해석되고, 저항의 상징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0 대중봉기의 민주주의>는 광주항쟁을 중국 천안문항쟁과 비교분석한 그의 박사논문을 비롯해 광주항쟁과 관련해 발표했던 논문들을 묶어 펴낸 책이다. 김 교수의 5·18에 대한 해석틀은 ‘대중봉기’다. 김 교수가 말하는 ‘대중봉기’는 “어떤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커다란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상상할 수 없던 행위를 발명하며, 잡다한 목소리와 언어를 쏟아내고 비범한 자발성을 표출하는 시공간을 창출하는 과정”이다. 대중봉기는 우발적이고 갑작스럽게 일어나기 때문에 체계적인 ‘대항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지배층에 저항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배 이데올로기’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서 싸움으로써, 그 이데올로기를 표방했을 뿐 현실에서 제대로 구현하지 않고 있던 지배층에 균열을 일으킨다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김 교수는 광주항쟁의 이데올로기는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자유 민주주의’였다고 분석한다. 시민군은 차량에 태극기를 꽂고 질주했고, 장갑차를 모는 시민도 태극기를 흔들었으며, 병원 영안실과 상무관에 안치된 시민들은 태극기로 감싸졌다. 당시 시위와 집회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는 애국가였다. 김 교수는 “광주 시민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하나의 이상적 보편성으로 상상된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이었으며, 그들은 국민의 일원으로서 도저히 대한민국의 군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자들에 맞서 싸운 것이었다”고 말했다.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 역시 ‘영웅’들이 아니라 길거리에 나가면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고 김 교수는 강조했다. 하지만 1980년대 학생과 지식인 등 ‘살아남은 자’들은 더는 자유 민주주의의 틀로 광주항쟁을 해석할 수 없었다고 김 교수는 짚는다. 전남도청의 ‘최후의 밤’의 비극성과 ‘항쟁공동체’의 유토피아적 요소는 급진적 사상을 자극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김 교수는 “1980년대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한국 사회에 마르크스주의가 부활한 것은 광주항쟁의 사후 효과였다. 말하자면 대중봉기는 이후 새로운 사회운동과 대항 이데올로기를 활성화시키는 모태였다”고 말했다. ‘대중봉기→집단적 주체 형성→새로운 사회운동’이라는 흐름은 한국 사회운동사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김 교수는 분석했다. 이런 해석을 통해 김 교수는 광주항쟁을 ‘노동계급 혁명’ 등으로 과대평가하거나, ‘낮은 수준의 운동’이었다고 폄하하는 경향을 모두 경계한다. 하지만 광주항쟁은 1990년대 정부의 공식 인정을 거쳐 ‘민주화운동’으로 제도화된 뒤, 차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 수준의 담론에 갇히게 된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말하지 못하는 비밀은 5·18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젊은 세대가 5·18에 관해 잘 모른다는 현실은 한 현상일 뿐입니다.” 그는 5·18의 ‘죽음’은 사회운동이 무기력해지면서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해낼 힘이 떨어지고, 학계 역시 이론적으로 빈곤해진 결과라고 지적했다. 급기야 최근에는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이 보수 매체를 통해 방송되기까지 했다. “보수 세력이 두번이나 집권하면서 자신감이 생긴 거겠죠. 하지만 이미 광주항쟁은 87년 항쟁을 거치면서 헌정체제의 일부가 됐기 때문에 어떤 보수학자나 보수 정치인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광주항쟁을 부인하는 발언은 할 수 없을 겁니다. 그건 현재 대한민국 체제를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이른바 ‘일베 사태’를 보는 김 교수의 시선은 좀더 복잡하다. “젊은이들이 사회에 대한 불만을 원한과 증오의 형태로 쏟아내는 것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이 약해진 결과입니다. 이에는 민주정부의 실패, 5·18의 적자이면서도 기득권층이 돼버린 일부 운동세력의 책임도 있다고 봅니다.” 5·18 정신의 ‘부활’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김 교수는 “사회운동의 성장”이라고 대답했다. “사회운동이 강한 시대에는 과거의 대중봉기, 사회운동도 끊임없이 다시 해석되고 새로운 의미가 부여됩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운동세력은 광주항쟁을 반복하고 재현하기 위해 싸웠을 뿐 아니라, 4·19혁명에 대해서도 이전 세대와는 다른 해석을 내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2008년 일어났던 ‘촛불시위’도 ‘대중봉기’로 파악한다. 촛불시위가 앞으로 어떤 집단적 주체를 구성하고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이어질지도 주목해야 할 대목이라고 김 교수는 말했다. “촛불시위를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젊은 세대들에게 ‘왜 5·18도 모르나’, ‘너희는 역사를 배워야 한다’고 훈계만 하지 말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문제를 같이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글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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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 지향은 자유민주주의
5·18 부정은 헌정 부인하는 꼴 “언제부터인가 5·18 광주항쟁은 서서히 잊혀지고 있었습니다. 그 망각의 이면에는 전반적인 사회운동의 무력화와 퇴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광주항쟁에 대한 연구서 <1980 대중봉기의 민주주의>(소명출판)를 펴낸 김정한(43·사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정치학)는 20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새로운 사회운동이 활성화되고, 진보의 재구성이 이루어져야 5·18이 새롭게 해석되고, 저항의 상징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0 대중봉기의 민주주의>는 광주항쟁을 중국 천안문항쟁과 비교분석한 그의 박사논문을 비롯해 광주항쟁과 관련해 발표했던 논문들을 묶어 펴낸 책이다. 김 교수의 5·18에 대한 해석틀은 ‘대중봉기’다. 김 교수가 말하는 ‘대중봉기’는 “어떤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커다란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상상할 수 없던 행위를 발명하며, 잡다한 목소리와 언어를 쏟아내고 비범한 자발성을 표출하는 시공간을 창출하는 과정”이다. 대중봉기는 우발적이고 갑작스럽게 일어나기 때문에 체계적인 ‘대항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지배층에 저항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배 이데올로기’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서 싸움으로써, 그 이데올로기를 표방했을 뿐 현실에서 제대로 구현하지 않고 있던 지배층에 균열을 일으킨다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김 교수는 광주항쟁의 이데올로기는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자유 민주주의’였다고 분석한다. 시민군은 차량에 태극기를 꽂고 질주했고, 장갑차를 모는 시민도 태극기를 흔들었으며, 병원 영안실과 상무관에 안치된 시민들은 태극기로 감싸졌다. 당시 시위와 집회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는 애국가였다. 김 교수는 “광주 시민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하나의 이상적 보편성으로 상상된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이었으며, 그들은 국민의 일원으로서 도저히 대한민국의 군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자들에 맞서 싸운 것이었다”고 말했다.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 역시 ‘영웅’들이 아니라 길거리에 나가면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고 김 교수는 강조했다. 하지만 1980년대 학생과 지식인 등 ‘살아남은 자’들은 더는 자유 민주주의의 틀로 광주항쟁을 해석할 수 없었다고 김 교수는 짚는다. 전남도청의 ‘최후의 밤’의 비극성과 ‘항쟁공동체’의 유토피아적 요소는 급진적 사상을 자극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김 교수는 “1980년대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한국 사회에 마르크스주의가 부활한 것은 광주항쟁의 사후 효과였다. 말하자면 대중봉기는 이후 새로운 사회운동과 대항 이데올로기를 활성화시키는 모태였다”고 말했다. ‘대중봉기→집단적 주체 형성→새로운 사회운동’이라는 흐름은 한국 사회운동사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김 교수는 분석했다. 이런 해석을 통해 김 교수는 광주항쟁을 ‘노동계급 혁명’ 등으로 과대평가하거나, ‘낮은 수준의 운동’이었다고 폄하하는 경향을 모두 경계한다. 하지만 광주항쟁은 1990년대 정부의 공식 인정을 거쳐 ‘민주화운동’으로 제도화된 뒤, 차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 수준의 담론에 갇히게 된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말하지 못하는 비밀은 5·18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젊은 세대가 5·18에 관해 잘 모른다는 현실은 한 현상일 뿐입니다.” 그는 5·18의 ‘죽음’은 사회운동이 무기력해지면서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해낼 힘이 떨어지고, 학계 역시 이론적으로 빈곤해진 결과라고 지적했다. 급기야 최근에는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이 보수 매체를 통해 방송되기까지 했다. “보수 세력이 두번이나 집권하면서 자신감이 생긴 거겠죠. 하지만 이미 광주항쟁은 87년 항쟁을 거치면서 헌정체제의 일부가 됐기 때문에 어떤 보수학자나 보수 정치인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광주항쟁을 부인하는 발언은 할 수 없을 겁니다. 그건 현재 대한민국 체제를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이른바 ‘일베 사태’를 보는 김 교수의 시선은 좀더 복잡하다. “젊은이들이 사회에 대한 불만을 원한과 증오의 형태로 쏟아내는 것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이 약해진 결과입니다. 이에는 민주정부의 실패, 5·18의 적자이면서도 기득권층이 돼버린 일부 운동세력의 책임도 있다고 봅니다.” 5·18 정신의 ‘부활’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김 교수는 “사회운동의 성장”이라고 대답했다. “사회운동이 강한 시대에는 과거의 대중봉기, 사회운동도 끊임없이 다시 해석되고 새로운 의미가 부여됩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운동세력은 광주항쟁을 반복하고 재현하기 위해 싸웠을 뿐 아니라, 4·19혁명에 대해서도 이전 세대와는 다른 해석을 내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2008년 일어났던 ‘촛불시위’도 ‘대중봉기’로 파악한다. 촛불시위가 앞으로 어떤 집단적 주체를 구성하고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이어질지도 주목해야 할 대목이라고 김 교수는 말했다. “촛불시위를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젊은 세대들에게 ‘왜 5·18도 모르나’, ‘너희는 역사를 배워야 한다’고 훈계만 하지 말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문제를 같이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글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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