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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꼬리칸과 송전탑

등록 2013-08-11 19:46수정 2015-11-03 00:40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설국열차
자크 로브 뱅자맹 르그랑 글, 장마르크 로셰트 그림, 이세진 옮김
세미콜론 펴냄(2013)
울산 송전탑의 두 비정규직 노동자 최병승, 천의봉씨가 296일 만에 내려왔다. 8월의 아주 무더운 날이었다. 그날 오후 한반도엔 폭염특보가 내려졌다. 봉준호 감독이 모티브로 삼은 만화 <설국열차>엔 7월의 어느 날이 나온다. 그날 오후 갑자기 눈이 내렸다. 얼음장 같은 바람이 요상하게 불어닥치기 시작했고 몇 시간 만에 생명도 문명도 사라져버렸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역 한쪽에 서 있던 초호화 열차였다. 세상이 뒤집힐 줄도 모르고 마지막으로 보내던 좋은 시절에 마련된 열차였다. 추운 겨울에도 끄떡없이 언제까지고 달릴 수 있도록 고안된 열차는 원래는 거물들 군인들 장교 가족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화물칸 객차를 이어붙이면서 거물들이 애초에 태울 생각이 전혀 없던 사람들까지 타게 되었다. 1001량, 문명의 마지막 보루, 설국열차는 이 세상의 마지막 생존자들을 품에 안고 17년째 달리고 있다. 백색으로 얼어붙은 열차 밖에는 모든 생명이 사라졌기 때문에 약속의 땅도 목적지도 없이 열차는 다만 달릴 뿐이다. 기차의 앞칸인 황금칸에는 부자들이 타고 있다. 그들은 와인을 마시면서 그 일이 닥치기 전 좋은 시절처럼,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살아간다. 그들은 거기서도 시장을 독점한다. 뒤칸인 꼬리칸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린다. 열차는 ‘칸막이로 나뉘어 있고 꽉 막힌 세상에서 부자나 가난뱅이나 객차의 벽만 보고 살아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두 계급 모두에게 열차는 생의 근원이다. 열차가 멈추면 죽음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풍경이 예전보다 천천히 지나간다는 것이었다. 열차의 속도가 느려지고 있는 것이었다. 해결책으로 나온 것은? 꼬리칸을 떼어버리자는 것이었다. 그럼 꼬리칸에 탄 사람들은? 열차의 앞칸에 탄 사람들은 그깟 버러지들을 왜 신경 써? 라고 말한다. 공동체를 위해서 누군가는 희생해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말한다. 꼬리칸에 탄 사람들 중에는 탈주자들이 나온다. 어떻게든 앞칸으로 가야만 살아남기 때문이다. 원작 설국열차 1편엔 끝까지 어떤 해결책도 나오지 않는다. 어차피 죽을 것. 모든 것은 시간문제일 뿐. 엔진도 어느 날인가는 멈추게 될 테고. 이 만화에서 가장 공포스런 것은 열차 밖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탈주를 하려고 해도 갈 곳이 없다는 폐쇄성. 그래서 설국열차는 불길한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서나 저항군들이 앞칸을 차지하느냐 마느냐가 관건인 에스에프 게임의 중간 정도로 우리를 자극할지 모른다.

하지만 설국열차와 우리가 지금 사는 세상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공동체로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아가는 정치적 능력이란 게 도무지 보이지 않는데다 수많은 사람들의 실존적인 안정감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비정규직 10년의 무게를 짊어지고 세상이 꼬리칸과 황금칸으로 나누어지는 것의 위험을 말한 두 노동자의 목소리는 이 땅 어느 곳의 냉기를 녹였는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두 노동자가 올라가 있던 송전탑 근처에도 기차가 달리고 있었다. 기차는 가끔 두 노동자를 향해서인지 경적을 울렸다. 두 노동자는 간혹 그 경적 소리에 힘을 얻곤 했다. 경적 소리는 따뜻했고 그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 바깥을 상기시켜주었을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추워도 설국열차와는 다른 열차를 한번 상상해 보고 싶다. 내리고 싶은 곳이 잔뜩 있고 기차 안은 서로 칸막이로 나뉘지 않고 그저 함께 어디론가 달려가는 것이 신나는.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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