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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당신의 생활은 얼마큼 외주를 줬나요

등록 2013-10-06 20:16

사생활을 잠식하는 시장에 비웃음을 날리는 만평이다. 사진 속 노점상은 “눈 맞추는 데 1달러”라고 쓴 매대 앞에 서 있다.  이매진 제공
사생활을 잠식하는 시장에 비웃음을 날리는 만평이다. 사진 속 노점상은 “눈 맞추는 데 1달러”라고 쓴 매대 앞에 서 있다. 이매진 제공
서로 도와가며 하던 집안일들이
이젠 사고파는 시장으로 넘어가
사생활 상품화는 비인간화 낳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 소외시킨다

나를 빌려드립니다
알리 러셀 혹실드 지음, 류현 옮김
이매진·2만원

영어로 된 책의 원제는 ‘아웃소싱된 자아(The outsourced self)’다. 나 자신을 위탁 처리하는 세상이란 의미다. 1983년 <감정노동>이란 책을 통해 인간, 특히 여성의 감정이 상품화되고 착취당하는 과정을 밝혀 감정노동학을 창시한 알리 러셀 혹실드 캘리포니아대 사회학과 명예교수가 이번에는 ‘사생활을 사고파는 아웃소싱 자본주의’란 개념을 들고나왔다.

유년 시절에 극단적으로 상반된 느낌을 줬던 두곳의 기억을 지은이는 책 첫머리에 꺼내놓는다. 한곳은 어린 시절 여름 한철을 보냈던 할머니댁 농장, 다른 곳은 12살부터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의 대리 공사인 아버지를 따라 살게 된 흰색 대저택이다. 할머니댁 농장에서 그는 오빠와 사촌들과 어울려 옥수수 껍질을 벗기고 완두콩 깍지를 벗기다 수영을 하며 지냈다. “그냥 베푸는” 이웃이 사는 그 마을에서 열살 아이는 “어떤 큰 부분의 일부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땐 몰랐지만 ‘공동체’였다.

이스라엘의 대사관 관저로 이사 간 열두살엔 모든 것이 달라졌다. 경호원들은 깍듯이 거수경례를 했고 요리는 조지프가, 집안일은 메이젤이, 학교에 갈 때 운전은 샬롬이란 이름의 운전사가 했다. 농장에서는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일을 손수 해야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면 이제는 아주 사소한 일까지 스스로 할 수 없는 이유가 궁금했다.

관사에서는 모든 집안일을 조지프, 메이젤, 샬롬처럼 ‘지속적인 관계’를 기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돌아가며 대신했다. 그것은 ‘공동체’가 아니었다. 갓 다림질한 옷, 맛있는 음식에는 시장 원리에 따라 대가가 지급됐다. 가족이나 이웃들끼리 부대끼며 얼굴 붉힐 일 없이 관저 분위기는 늘 밝고 유쾌했다. 다섯달 뒤에 조지프와 메이젤 대신 샤를리와 조르게가 새로 왔다. 조리사도 바뀌었다.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몇십년이 흘렀다.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세상도 바뀌었다.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관사에서처럼 사생활 문제 해결을 위해 사람을 고용한다. 사람들이 이웃으로, 친구로, 가족으로 서로 도와가며 한 많은 일들이 시장으로 넘어갔다. 육아 도우미나 가사 도우미는 이미 일상의 일부가 됐고 개인 강사, 이벤트 기획자, 인생 상담사, 개 산책시키는 사람 등도 고용한다. 엘리트들의 전유물이던 대인 서비스가 중산층으로 확대되면서 이 분야에 몸담으려는 미국인들도 늘고 있다.

이런 사생활 서비스의 확산은 이전에는 진입이 막혀 있던 사람들의 ‘감정생활’에까지 시장이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이런 변화를 탐구하기 위해 지은이는 러브 코치, 웨딩 플래너, 결혼 생활 상담 치료사, 대리모, 육아 도우미, 파티 플래너, 가사 도우미, 임대 친구, 노인 돌보미, 장례사 등을 인터뷰했다.

육아 서비스는 이미 “아이 키우는 데 서비스 몰 하나가 통째로 필요하다”고 표현할 만큼 분야별로 세밀하게 상품화가 된 상태다. 미국 상류층 사회에서는 이미 20세기 초에 아기에게 대신 젖을 물리는 유모(대부분 이주노동자)를 고용하는 풍토에 대한 논란이 제기됐었다. 이제는 고급 분유를 더 신뢰하는 분위기라 이 문제는 해결됐다. 유모차와 기저귀를 고르는 일부터 베이비 플래너에게 맡기고 입주 유모와 함께 살며 아이의 배변 훈련과 생일 파티, 여름 캠프, 방과 후 학원 데려다주기, 자전거 타는 법 가르쳐주기 등을 전문가에게 맡긴다.

오늘날 미국 어린이의 70%가 맞벌이 가정에서 자라는 상황에서 누가 아이, 병자, 노인을 돌볼 것인가? 지은이는 질문을 던진다. 아이를 좋아하지 않아도 유모가 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여성들은 바닥난 인내심을 애써 숨기고 값비싼 가구가 들어찬 거실을 청소하는 하우스 매니저는 부러운 마음이 드러나 고용주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표정을 관리한다. 고용인들의 사생활은 시장에 지배당하고 노동자들의 매일은 감정노동으로 얼룩진다.

사생활의 상품화는 인간관계의 비인간화를 낳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더 소외되고 있다. 그런데도 과거처럼 기댈 만한 공동체도 없고 유럽식 사회복지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 미국과 한국 같은 곳의 대도시라면 이런 현상을 피할 길이 없다. 일하는 여성은 많아졌고 이혼율은 높아졌다. 가족이 가족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역량은 크게 잠식됐다. 186개 나라가 출산 전후 휴가에 정부 보조금을 지급하지만 미국은 이조차 하지 않는다.

막다른 길에 몰린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눈길을 돌릴 수 있는 곳은 ‘시장’뿐이다. 이렇게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는 세상을 알리 러셀 혹실드는 또 한번 예리하게 짚어냈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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