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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눈을 뜨고 꾸는 풀베개 속 여행

등록 2013-11-03 19:41수정 2015-11-03 00:39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풀베개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현암사 펴냄(2013)
나쓰메 소세키 <풀베개>의 첫 문장은 이렇다.

“산길을 오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이지(理智)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의 발목이 잡힌다. 자신의 의지만 주장하면 옹색해진다.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겨가고 싶어진다. 어디로 옮겨가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이 생겨난다.”

퇴근하다가 공원을 지나쳐 갔다. 갑자기 다시 공원으로 돌아가서 나무 아래 의자에 앉았다. 나쓰메 소세키가 산길을 오르면서 한 생각을 나도 해질녘 나무 그늘 아래서 해 본다. 떠나 봤자 별수 없다는 말보다 훨씬 좋다. 나도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가을인데도 가을인지도 모르고 사는 것일까? 무슨 이유일까? 세상의 아름다운 것에서 기쁨을 느끼기보다 조금이라도 덜 아름다운 것에서 고통을 느끼는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풀베개>의 주인공 화가는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비인정’의 여행을 떠난다. 인정에 얽매이지 않는 여행을 한다는 뜻이다. 비인정은 몰인정과는 다르다. 사람도 그냥 산벚나무나 나비, 동백, 작은 파도처럼 자연의 일부로 보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인적이 드문 산골로 시인의 태도로 여행을 한다. 오로지 봄과 함께 움직이는 여행을 한다. “봄의 빛깔, 봄의 바람, 봄의 사물, 봄의 소리를 다져넣어 그 정기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모공”에 스며들게 한다. 그런 날 시시한 말이나 늘어놓는 사람은 일찌감치 한 줌의 먼지가 되어 봄볕 속을 떠도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누구나 시 한 수 짓지 않고도 시인이 될 수 있다. “한때 더럽혀진 몸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와 자신을 잊고 박수의 흥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면 말이다. 그 여행에서 그가 그리고 싶었던 그림은 “인간을 떠나지 않고 인간 이상의 영원이라는 느낌을 내는 것”이었다. 마침 그에겐 그려 보고 싶은 얼굴도 있다. 바로 그가 묵고 있는 온천장의 아름다운 딸이다. 그녀 때문에 이 여행은 어쩐지 현실 같지 않고 신비로웠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녀에겐 부족한 것이 있다. 그녀의 얼굴에 없는 것, 고통도 질투도 증오도 아니다. 바로 연민이다. “연민은 신이 모르는 정이고, 신에게 가장 가까운 인간의 정이다.” 그런데 문제는 연민은 비인정이 아니고 인정이라는 점이다. 다시 인간사에 얽혀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순간, 전쟁터로 향하는 기차가 떠날 때 전남편을 보는 그녀의 얼굴에 망연자실한 표정이 나타난다. 연민이다. 그림은 바로 그 순간 완성되었다. 결국 다시 인간의 마음이다. 밤바다 고기잡이배의 불빛, 아지랑이, 삼나무 숲, 아득하게 아름다운 것들을 지나 인간은 왜 다시 인간에게로 돌아가는 것일까? 그것도 마음(연민)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일까? 마음속에 뭔가를 지니고 있어서 인간은 ‘인간이면서 인간 이상의 영원’을 알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저 자연의 기나긴 행렬에 참여할 수도 있다.

어쨌든 <풀베개> 속 여행은 무척 아름다웠다. 나도 풀을 베고 누워 있는 기분이 들었다. 눈을 감으면 고스란히 다 그려진다. 그립다. 눈을 뜨고 꾸는 꿈 같기도 하다. 눈을 뜨면 덧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름다움도 어려움도 눈에 다시 담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누워 있는 것 같았다.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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