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돼지가 구덩이에 빠진 날

등록 2013-11-10 19:46

그림 이야기꽃 제공
그림 이야기꽃 제공
일생을 틀 속에만 갇혀 지내
새끼 한번 핥아주지도 못한
어미의 첫 나들이는 ‘살처분’

돼지 이야기
유리 지음
이야기꽃·1만3500원

“알고는 못 먹는다”며 외면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 내막을 알고 나면 도저히 다시 그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을 수 없을 때, 우리는 그런 태도를 취하곤 한다. 그중의 하나가 돼지다.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자라나 도축되는지, 특히 전염병인 구제역이 발생했을 때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알고도 모른다. “구제역으로 돼지 331만8000마리 살처분”이라는 내용의 신문 기사는 그래서 더 건조한 톤으로 쓰이는지도 모른다. ‘살처분’이라고 점잖게, 혹은 잔혹하게 일컬은 그 사건을 이 책은 기어코 끄집어내 그림으로까지 그려 생생하게 눈앞에 내민다.

하지만 아름답다. 하늘을 향한 돼지의 단단한 코, 새끼를 바라보는 눈망울, 그 위의 속눈썹까지 그 자체로 온전한 생명이다. 그런 돼지가 자기 엉덩이도 볼 수 없는 틀 속에 갇혀 일생을 보낸다. 새끼에게 젖을 주면서도 틀 안에 누워 있다 보니 한번 핥아주지도 못한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해줘도 못 먹는다. 눈물이 난다.

그런데 더 나간다. 살처분되던 날, 2010년 겨울의 어느 날을 그려놨다. 구제역 같은 전염병의 경우 한 마리만 걸려도 모두 죽을 운명이다. 비좁은 틀에 돼지들을 가둬놓고 병에 걸릴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항생제 사료만 먹여대던 사람들은 “이것밖에 방법이 없다”며 구덩이를 파놓고 그곳으로 돼지들을 몰아넣는다. 모두 죽인 뒤 구덩이를 덮어야 하지만 알 수 없다. 한두 마리가 아니라 331만8000마리가 아닌가! 평생을 틀에 얽매여 살았던 돼지들에게는 살처분, 그날이 첫 외출이다.

전염병이 돌아 자신이 키우던 가축들을 살처분해야 하는 축산인들을 취재차 만난 적이 있다. 살처분을 하며, 자식처럼 이름까지 붙여가며 키웠던 가축들을 묻으며 오열하다 한동안 정신이 나간 이도 있었다. 모두의 비극이다. 돼지도 사람도 더 나은 미래를 꿈꿔보자는 것이 책의 의도일 터다. 맨드라운 연필로 그린 듯한 그림체가 감동을 더한다. 어린 시절을 경기도 여주의 농장에서 뛰어놀며 자란 신인 작가 유리의 감성이다. 김장성 이야기꽃 출판사 대표가 글을 다듬는 데 힘을 합했다고 한다. 초등 4학년부터.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그림 이야기꽃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2.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괴물이 되어서야 묻는다, 지금 내 모습을 사랑해 줄 수는 없냐고 3.

괴물이 되어서야 묻는다, 지금 내 모습을 사랑해 줄 수는 없냐고

‘시그널’ 10년 만에 돌아온다…내년 시즌2 방송 4.

‘시그널’ 10년 만에 돌아온다…내년 시즌2 방송

할리우드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 AI, 아카데미도 접수하나 5.

할리우드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 AI, 아카데미도 접수하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