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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아카데미 한국’을 꿈꾸는 밀알

등록 2013-11-10 19:57수정 2013-11-10 21:34

지난 5일 서울 남대문로의 사무실에 함께 자리한 아카넷 사람들. 왼쪽 서 있는 사람부터 시계방향으로 양정우(편집), 정정희(아카넷주니어·편집), 박병규(북스코프·편집), 김일수(기획), 좌세훈(편집), 박경아(디자인), 박정은(관리), 천정한(마케팅), 박수용(편집), 김정호(대표)씨. 신소영 기자 <A href="mailto:viator@hani.co.kr">viator@hani.co.kr</A>
지난 5일 서울 남대문로의 사무실에 함께 자리한 아카넷 사람들. 왼쪽 서 있는 사람부터 시계방향으로 양정우(편집), 정정희(아카넷주니어·편집), 박병규(북스코프·편집), 김일수(기획), 좌세훈(편집), 박경아(디자인), 박정은(관리), 천정한(마케팅), 박수용(편집), 김정호(대표)씨.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작지만 강한 출판사 아카넷

대우총서, 한국연구재단총서 등
읽기 어려운 전문서적들 주력
지난해 ‘우리고전 총서’ 시작
“고전도 다시 번역돼 교감해야”
“지은이와 독자의 수준이 같다.” 김정호(53) 아카넷 대표는 그렇게 말했다. 출판사 아카넷의 특징을 잘 드러내주는 한마디다. 빈말이 아니다. 아카넷 출판 도서들의 주종을 이루는 학술총서들 가운데 대우고전 총서는 제1권이 앙리 베르그송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최화 옮김), 제2권이 막스 셸러의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진교훈 옮김)다. 2002년 <실천이성 비판>(백종현 옮김)부터 내기 시작한 이마누엘 칸트의 책이 9종이다. 그중 순수이성·실천이성·판단력, 세 비판서만 지금까지 6만부가량 나갔고, 매년 2000권 정도가 계속 팔리고 있단다.

그 덕에 국제 학술·출판계에서 “한국은 칸트가 제일 많이 팔리는 나라”라는 얘길 듣는다고 했다. “도대체 칸트를 누가 이렇게 많이 보는지 우리도 궁금하다”며 김 대표는 말했다. “매년 대학 철학과 신입생들, 그리고 인접학문 전공자들이 다 사더라도 한해 1000권 정도밖에 안 될 텐데. 지식 지향의 일반 교양인들이 주로 사 보지 않을까?”

대우고전 총서가 서양 고전 번역서들인 데 비해 대우학술 총서에는 동서양 학술서 외에 한국역사연구회의 <조선은 지방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윤석왕 등의 <물리음향학> 등의 국내 저작들도 다수 들어 있다.

지금은 아카넷에 가장 큰 힘이 돼주고 있는 한국연구재단 총서도 헤르만 프렝켈의 <초기 희랍의 문학과 철학>(김남우·홍사현 옮김)에서부터 자크 고드쇼의 <반혁명>(양희영 옮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심리철학적 소견들>(이기흥 옮김)에 이르기까지 일반인들이 읽기 쉽지 않은 전문 학술서들이다.

아카넷이란 이름 자체가 아카데미 네트워크를 줄인 말이다. “도서출판을 통해 학술 분야의 가치 있는 콘텐츠를 우리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데 이바지하고자 하며 이를 기반 삼아 우리 사회의 다양한 분야와 계층 간에 소통이 이뤄지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네트워크가 형성되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이런 책들만 내는 건 아니다. 아프리카 소년병을 통해 전쟁의 비극을 고발한 단행본 이스마엘 베아의 <집으로 가는 길>(송은주 옮김)도 6만부가 나갔고, 가족의 일상을 따뜻한 시선의 사진으로 담은 모리 유지의 <다카페 일기>(권남희 옮김) 시리즈 3권도 각 권 1만부 넘게 팔렸다. 이들 책은 아카넷이 새로 만든 ‘북스코프’라는 브랜드명으로 출판됐다.

아카넷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기업 대우 재단의 지원으로 간행된 대우학술·고전 총서의 이미지가 강했다. 김 대표는 “대우 쪽과 아무런 직접 연관이 없다”며 “대우 총서들이 예전엔 매년 20권 정도 나왔지만 지금은 4~5권 정도밖에 안 된다. 대신 한국연구재단 총서들이 연간 30권 이상 출간된다”고 했다. 김 대표는 대우 구조조정본부 부장으로 일하다 1997년 외환위기 뒤 대우가 해체되면서 퇴사했다. 김 대표가 2000년 2월 아카넷을 설립해 학술사업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1980년대 초부터 학술지원사업을 해 온 대우재단 쪽의 지원을 생각한 듯하다. 하지만 대우 해체 뒤 상황이 달라졌다. 김일수(42) 편집기획팀장은 “대우재단은 여러 학술지원재단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했다.

김 대표는 연간매출 10억원이 넘는 “아카넷 손익을 좌우하는 최대요소는 시장”이라고 강조했다. 직원은 대표를 포함해 12명. 지금까지 500종 가까운 책을 냈다. 연간 40종, 매달 3권 정도다. 대종은 인문사회 분야. 총서와 단행본 출판비율은 6 대 4 정도로 학계와 연계해서 내는 책이 50%를 넘는다.

김 대표는 “학술원이 고맙다”고 했다. 학술원 우수도서선정사업에 아카넷 책들이 한해 최대 19권까지 선정됐단다. 올해도 서울대출판부를 빼고는 가장 많은 9종이 선정됐다. 선정되면 한 종당 1000만원 안팎의 지원을 받는다. 한국연구재단은 저술의 경우 권당 850만원씩을 지원한다. “그게 우리의 입지 마련에 디딤돌이 됐고, 앞으로 좋은 책을 골라 낼 여유자금이 됐다”고 했다.

아카넷은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도 지난해 새로 시작했다. 지금까지 강희안의 <양화소록>(이종묵 역해)과 박은식의 <한국통사>(김태웅 역해), 류성룡의 <징비록>(김시덕 역해) 등을 냈는데, “1단계로 총 50권을 낼 계획”이란다. 김 대표는 말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학계의 학술적 가치를 사회 교양인들이 공유할 수 있는 단계가 됐다. 우리 고전도 세계화 시대에 맞게 다시 번역돼 대중이 교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과거가 훨씬 더 앞선 미래가 될 수 있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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