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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올 한 해 내가 가장 많이 말한 단어는?

등록 2013-12-01 19:43수정 2015-11-03 00:38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택광·박성훈 옮김
자음과모음(2013)
2013년이 가는 와중에 지그문트 바우만의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라는 책의 제목을 보니 지내온 시간을 돌아보게 된다. 날짜에 맞춰서 써내려갔으면서도 그는 왜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라고 했을까? 그는 사는 것과 쓰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바우만은 사는 것과 그것을 적어 내려가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라고 묻고는 조제 사라마구의 수필을 인용한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단어, 우리가 취하는 모든 동작은 의도하지 않은 자서전의 조각이다. 이 모든 것은 자신도 모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종이에 가장 자세하게 글로 쓴 삶의 이야기만큼 진실한 것이다.”

내가 12월31일 밤에 ‘2013년을 보내며’란 일기를 쓴다면 바로 이 문장으로 시작해보고 싶다. 나는 올 한 해 어떤 단어를 가장 많이 말했지? 어떤 단어를 가장 많이 들었지? 어떤 동작을 가장 많이 했지? 일기 쓰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반년을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지난여름 이후 몇 달에 걸쳐서 쌍용차 해고 노동자 스물여섯명을 인터뷰했다. 질문은 간단했다. 해고되기 전에는 누구였죠? 열심히 일했어요? 해고되고 나서 취업을 하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언제 슬퍼요? 언제 기뻐요? 꿈이 있어요? 어떤 남편, 어떤 아들, 어떤 동료였어요? 나는 궁금했던 것이다. 해고 노동자인, 길바닥에서 오년을 보내는 당신들은 어떤 인간인지. 그 대답들이 나의 일기가 될 것이다. 반복적일 정도로 많이 들었던 단어들이 떠오른다. “차마…못한다.” 그리고 ‘책임감’이다. 그들이 말한 책임감은 이런 것이다. ‘누군가 나의 말을 듣고 어떤 선택을 했고 그 선택 때문에 인생이 바뀌었음을 내가 잊지 않는 것.’

바우만은 2010년 12월18일의 일기 ‘존경과 경멸에 관해’에서 책임감에 대해 말한다. 바우만은 레비나스를 인용한다. 이때의 책임은 상급자, 상사, 명령자, 감독자를 향한 것이 아니다. 내가 책임을 느끼는 이는 나에게 어떤 것을 명령할 힘이 없다. 또 책임을 단념하거나 무시한다는 이유로 나를 벌할 수도 없다. “이를테면 그들의 약함으로 명령을 받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책임을 발견하는 순간을 ‘자각’의 순간, ‘깨어남’의 순간이라고 한다. 그 책임 때문에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한다.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불확실성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가시킨다. 왜냐하면 책임을 느끼는 것은 한번만 그렇다는 뜻이 아니니까. 매번 느끼는 것이니까. 이것이 내가 들은 이야기들의 중요한 한 축과 겹친다.

불안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 이야기가 단순하기를 바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확실한 것을 붙잡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은 선택의 순간에 이해관계같이 확실한 것이 아니라 가장 막연한 것들,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을 붙잡았다. 책임감, 동료애, 의리라는 이름의 것들. 그들은 인간의 약함 때문에 눈물을 흘렸고 길고 긴 불확실성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말했던 단어들, 무심코 했던 동작들, 아직 글로 표현된 적 없는 이야기들, 비밀스런 눈물들, 요동치던 감정들. 이것들을 다시 떠올려보니 바우만이 왜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라고 말했는지 알 것 같다. 일기였지만 동시에 증언이고 살 만한 세상을 향한 마지막 꿈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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