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인생의 맛: 몽테뉴와 함께하는 마흔 번의 철학 산책
앙투안 콩파뇽 지음, 장소미 옮김
책세상 펴냄(2014)
인생의 맛: 몽테뉴와 함께하는 마흔 번의 철학 산책
앙투안 콩파뇽 지음, 장소미 옮김
책세상 펴냄(2014)
편집실에 있는데 후배 피디가 “난데없이 뛰어들어와서는 선배, <인생의 맛> 읽어봤어요? 몽테뉴를 하루에 5분씩 40회 방송해서 엮은 책이래요. 라디오에서 그런 것 방송하다니 진짜 부럽다. 어떤 책인지 읽으면 말해줘요.” 이렇게 말하더니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밥 먹고 하는 일이 라디오로 뭘 방송할까 고민하는 일이니 <인생의 맛>이라는 책에 관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몽테뉴와 나 사이에는 뭔가가 있다. 나는 몽테뉴 때문에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도 할 수 있다. 사실 책의 세계로 나를 이끈 것은 처음에는 몽테뉴의 글이 아니라 몽테뉴의 서재였다.
1533년에 태어난 몽테뉴는 1571년께 은퇴했다. 몽테뉴가 은퇴 후 들어간 곳은 원래는 창고로 쓰이던 삼층짜리 좁은 탑이었다. 몽테뉴는 서재의 난로 위 벽에 라틴어로 대략 이런 말을 써두었다. ‘나는 서른여덟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오래전부터 궁정에서의 굴종과 공직의 부담에 지친 나머지 절반도 남지 않은 여생을 자유롭게 보내기 위해서 이곳에 들어왔다.’ 원통형의 장식 없는 검소한 탑, 좁은 계단, 1000권의 책, 고독. 몽테뉴의 서재 사진을 본 순간, 내가 살고 싶은 삶을 미리 살다 간 사람을 본 듯한 반가움을 느꼈다. 아니, 그 사진을 보기 전에는 살고 싶은 삶의 모습이 어슴푸레했는데 그 사진을 본 순간 내가 원하는 미래가 선명하게 보였던 것 같았다. ‘아, 나도 저거면 되는데, 다른 것은 필요 없는데, 바로 저렇게 살고 싶은데.’ 이런 생각을 했었다.
몽테뉴의 은퇴는 일을 하지 않는다거나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는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반대로 그는 세상이 자신의 교과서가 되길 바랐다. 자신을 열어놓고 끝없이 배우려고 했다. 몽테뉴의 은퇴에는 이런 의미도 담겨 있다. ‘세상 사람들이 그대의 말을 해주길 찾을 필요가 없다. 그대가 어떻게 자신에게 말해야 할 것인가를 찾아라. 그대 자신에게 은퇴하라.’ 몽테뉴의 고독은 가족이나 친구가 없다거나 은둔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몽테뉴의 고독은 삶의 태도였다. 세상이 미리 마련해둔 답이나 대세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맞서고 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격이니 직무니 하며 소란 떠는 세상일이 실은 공공의 일에서 사적인 이익을 끌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들에게 양심과 싸우게 버려두자.’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인생의 맛>을 읽어보았다. 평소에 감탄하면서 즐겨 애용했던 구절이 눈에 보였다. 이를테면 ‘내가 책을 만든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만들게 된 것이다’ 같은 구절이다.
하지만 이런 구절보다는 전쟁터 같은 세상에 필요한 생활윤리 같은 것을 더 절실하게 찾고 싶었다. 극도의 적대감이 판을 치는 상황에서 어떻게 변함없이 자신의 자유와 양심을 지켜나갈 것인가? 몽테뉴는 최악의 상황 (그가 살던 시대는 종교전쟁이 계속되었다) 속에서 한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기술에 대해 관심의 끈을 결코 놓지 않았다. 절망적인 시대를 살았지만 절망하지 않았다. 절망하는 대신에 관찰하고 이야기했다. 피비린내 나는 교조주의자들의 시대에 관용에 대해, 인간에 대해, 양심에 대해 용기 있으면서도 부드럽게 말했고 허위를 경쾌하게 조롱했다. 40번으로도 부족하겠지만 이 시대에 꼭 다시 읽고 싶은 몽테뉴의 구절들을 모아서 방송을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나도 들었다.
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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