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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쌍용자동차의 슬픈 얼굴의 기사들

등록 2014-12-11 22:26수정 2015-06-03 10:38

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돈키호테 1, 2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열린책들 펴냄(2014)

정년퇴임. 누구에게나 만감이 교차하는 행사일 것이다. 누구나 시간이 무엇일까, 세월이 무엇일까, 앞으로는 어떻게 살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지난 6일 토요일 ‘좋은 이별’이란 특별한 정년퇴임식에 다녀왔다. 쌍용차에서 정년퇴임을 맞은(혹은 맞이할 수도 있었을) 두사람을 위한 행사였다.

문기주 지회장이 “형님들 고맙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편지를 낭송했다. “일명 산자였으나 함께 살자고 77일 파업에 함께 참여한 후에 징계 해고되었다가 해고 무효 소송에서 승소해서 다행히 복직하였으나 복직한 지 1년7개월 만에 정년퇴직한 박일 형님. 그리고 정리해고 이후 어머니, 형수님이 아파서 병수발을 들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이런저런 일을 해오신 승태 형님. 우리가 가장 어려웠을 때 동료에 대한 의리를 지킨 분들. 함께함을 보여준 형님들. 오늘은 형님들에게 기쁘게 술 한잔 올리고 웃으면서 형님들을 보내고 싶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쌍차 정리해고자들이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보였다. 정의와 양심과 동료를 사랑했고, 그 사랑에 걸맞은 행동을 하려다가 가혹한 고초를 겪은 형님들의 시간과 자신들의 지난 시간을 겹쳐 떠올리면서 흘리는 눈물이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어떤 슬픈 얼굴이 겹쳐 떠올랐다. 일명 슬픈 얼굴의 기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는 자신이 세상에 있는 의무를 자각하고 있었다. 모욕을 쳐부수고 불의를 바로잡으며 정의를 세우고 곤궁한 자와 어려움에 처한 자와 약자를 돕고 어린아이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을 보호해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편력기사의 꽃이자 거울, 정수, 이정표’인 그는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인문학을 말하고자 하니 이것은 분배에 있어서는 정의가 실현되게 하고 각자에게 제 몫을 주고 훌륭한 법이 이해되고 지켜지게 하는 그 목적이 있소.”

그러나 돈키호테 데 라만차는 슬픈 얼굴의 기사다. 그가 생각한 바를 (생각만으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려 했기 때문이고, 그의 생각을 세상이 높이 평가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랑과 시는 세상과 현실과 대립되었다. 돈키호테에게도 시간은 중요한 문제였다.

나중에 돈키호테는 ‘하얀 거울의 기사’와의 결투에서 패배해 1년 동안 집으로 돌아가 꼼짝하지 말 것을 요구받는다. 1년 동안 돈키호테이기를 그만두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1년은커녕 단 한순간도 돈키호테이기를 그만둘 수가 없었다. 1년은 자기 자신이 자신이기를 그만둔 시간이었다. 죽은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느낄 만한 시간을 살 수는 없는 걸까? 돈키호테의 목소리로 대답해 보면 이렇다. ‘잘못된 것을 되돌리고 극복해내며 우리에게 영원한 명예를 안겨줄 상황과 위험에 과감히 뛰어들며’, 즉 돈키호테는 시간이 꿈과 현실의 대립의 간극을 좁혀주길 원했고 바로 그런 꿈으로 살아가길 원했다.

하여간 슬픈 얼굴의 기사들은 행사가 끝나자 음식을 나눠 먹었다. 세상의 모든 종자 중 가장 말이 많은 종자 산초의 말이 생각났다. “네가 누구와 함께 다니는지를 말하면 네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마. 네가 누구한테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풀을 뜯느냐가 중요하다.”

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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