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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아이들은 죽을 수도 죽지 않을 수도 있다

등록 2015-04-09 20:31수정 2015-05-28 14:42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민음사 펴냄(2011)

비가 오락가락했던 5일 저녁,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을 폐기할 것 등을 요구하는 세월호 희생자 및 실종자 가족 도보행진단이 들어오는 광화문에 갔다. 부모들은 다시 상복을 꺼내 입었고 다시 영정사진을 목에 걸었다. 부모들은 영정사진이 행여 비에 젖을까봐 꽉 끌어안고 있었다. 집회에서 한 어머니는 끝내 얼굴을 한번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영정사진 속 아이의 눈과 눈동자와 코와 입과 턱, 얼굴의 모든 윤곽선들을 손가락으로 따라가고 쓰다듬고 상복 소매로 깨끗이 닦기를 반복하느라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녀가 누구인지 일깨워 줄 수 있는 것은 그 윤곽선을 기억하고 만질 수 있는, 사랑하는 하나의 얼굴 속에 있었다. 집회의 마지막 순간에 유족들과 시민들이 서로 끌어안았다. 안기 전에 서로 예를 갖춰 깊숙이 인사했다. 그리고 꼭 끌어안고 나서 다시 깊숙이 몸을 숙여 예를 갖춰 인사했다. 지친 얼굴의 한 아버지가 흐느낌 소리들을 뚫고 외쳤다. “꼭 좀 부탁합니다!”

보르헤스의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 한 첩보원은 정체가 탄로나 곧 죽을 운명이었다. 그는 좁다란 침대에 누워서 ‘나는 죽게 된다는 말인가?’ 되묻는다. 한때 어린아이였던 자신이 죽는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모든 것들이 정확하게 한 사람에게 정확하게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세기들의 시간, 그런데 단지 현재에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육지와 바다 위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 그런데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죽기 직전에 우리 아이들도 점점 가물가물해져가는 정신 속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을까? 한때 어린아이였던 내가 정말로 죽는다는 말인가? 이 일이 정말로 나에게 일어나는가? 설마 나에게 일어나려는가?

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그러나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는 어떤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구체적인 현재의 시간 말고 다른 시간도 존재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가능성과 마주쳐 하나는 선택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그런데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는 모든 것을 동시에 선택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양한 미래를 선택하게 된다. 시간은 모든 가능성을 포함한다. 책의 한 장에서 주인공은 죽었다. 그러나 다음 장에서 그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 그는 죽을 수도 있고 동시에 죽지 않을 수도 있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속의 시간은 모든 현재가 무한히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수의 시간이다. “각 결말은 또 다른 갈라짐의 출발점”이 되고 미래의 시간은 “눈이 핑핑 돌 정도로 어지럽게 증식되고 분산되고 수렴되고 평형을 이루는 시간들”이다. 이런 상상 속에서 미래는 과거처럼 더 이상 어찌 해볼 수 없는 확정적인 시간이 아니다.

우리도 지금 보르헤스처럼 ‘갈라지는 시간’에 대해서 상상해볼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은 죽을 수도 있고 동시에 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두 가지 방식으로 동시에 상상해보면서 우리는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의심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앞을 향해 나가는 존재이지만 정말이지 뒤돌아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과거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어떤 미래를 상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시간도 끝없이 갈라지는 두 갈래 길이 있는 정원이다.

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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