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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두 개의 영혼을 지닌 도시 피렌체

등록 2015-06-04 20:14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집시와 르네상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김운찬 옮김/문학동네 펴냄(2015년)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가 어디야? 응, 피렌체 좋아해. 어떤 점이 좋았어? 미켈란젤로 언덕에 앉아서 아르노 강 너머로 해가 지는 것을 볼 때, 그 도시의 일몰은 분홍색인데, 시에나까지 쭉 이어지는 맞은편 언덕에 사이프러스 나무 한그루, 소나무 한그루 사이에 농가가 있고 그 농가들에 차례차례 주황색 불이 들어오는 게 좋았었어. 그때 불을 켜고 불을 끄는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동작 안에도 인간적 갈망이 있다는 생각을 했었어. 내일이 더 나은 날이 되길 바라는 동경을 품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야. 나는 일몰 아래 농가의 불빛에서 그 동경을 본 거야. 그리고 둥근 돔이 있는 꽃의 두오모 성당의 부드러운 색깔과 활기찬 베키오 다리를 걸었던 것과 보티첼리의 그림을 본 것도 잊지 못할 거야.

이 대화는 가상의 대화가 아니다. 피렌체는 내게 즐거운 추억으로 가득찬 도시이기 때문에 실제로 나는 이렇게 열 번도 더 이야기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안토니오 타부키의 <집시와 르네상스>를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그림엽서에 나오는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바라본 장밋빛 석양의 피렌체, 아르노 강 베키오 다리와 그 위에 즐비한 모조 귀금속 세공품 가게, 팔라초에서 벌이는 축제가 한창인 피렌체는 사회학자들이 말하듯이 (…) 위대한 자 로렌초(메디치)가 아직도 원기왕성하게 살아 있다고 생각하게 해줄 것이 분명하다. 피렌체는 이 믿음을 부채질하기 위해 이곳 행정가들과 더불어 할 수 있는 짓을 다 한다. 축제들, 무도회들, 경이로운 행사들이 이를 잘 말해준다.”

내 얼굴이 순식간에 일몰보다 더 빨개졌다. 물론 안토니오 타부키가 여행자의 통속성을 질책하기 위해서 <집시와 르네상스>를 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읽다 보면 스스로 알아서 굉장히 질책당하게 된다. 장소(피렌체-메디치, 르네상스)에 대해서 얼마나 신화화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는가, 피렌체뿐 아니라 다른 도시들에 대해서도 얼마나 지독한 상투성의 포로가 되어 있는가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안토니오 타부키가 로렌초 메디치도 알고 보면 좋은 인물이 아니라고 새삼 고발하기 위해서 이 책을 쓴 것도 아니었다.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가난뱅이들, 비참한 자들, 행상인들, 거지들에게 메디치가가 내린 포고령이 소개되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타부키가 들려주는 현대 피렌체 속 집시 이야기다. 주로 강요된 난민인 집시들은 “피렌체 두오모의 저 유명한 둥근 지붕의 황혼 풍경을 방해할 만한 장소에 멀리 떨어져 정착하는 한” 들어오도록 허락받았고 매트리스 한 장에서 여섯명이나 열명이 자고 쥐가 들끓고 수도시설도 위생시설도 없는 곳에서 어떠한 직업도 구할 수 없이 하층 프롤레타리아로 살아간다. 피렌체도 다른 신화화한 유명 도시들처럼 한 도시 안에 두 개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 타부키는 피렌체의 모든 훌륭한 전통들이 오히려 저 땅속 깊이 묻힌 이방인이 되어 있다고 말한다.

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우리는 타부키의 착상대로 <집시와 르네상스>를 ‘집시와 르네상스 사이의 여행’으로 읽을 수 있다. 그 ‘사이 여행’에서 우리는 어떤 마주침도 없는 도시, 외부에 굳게 닫힌 견고한 성채 같은 도시의 상처를 느낀다. 지금 그대로의 모습과는 다른 도시에 대한 갈망을 느낀다. 장소를 다른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갈망을 느낀다.

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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