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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스노볼’이 돌아왔다 자본가가 되어

등록 2015-06-18 20:46수정 2015-06-19 10:22

조지 오웰 ‘동물농장’ 패러디
나폴레옹에 쫓겨났던 스노볼
자본의 논리로 동물들 선동
풍요와 쓰레기 넘치는 ‘동물장터’
삼림지대 동물들 테러에 당하는데…
자본주의 동물농장
존 리드 지음, 정영목 옮김
천년의상상·1만2800원

조지 오웰이 영국 정부의 정보원에게 친소주의자(공산주의자) 명단 38명의 이름을 전달했다는 이른바 ‘오웰 리스트’ 사건은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반공이 국시였던 시절 <동물농장>과 <1984>를 접한 한국인들은 오웰이 반공주의자인 줄로만 알았다가, 실은 영국 노동계급의 비참한 삶을 생생하게 묘사한 르포 작가였으며, 스페인 내전에 공화파로 참전한 사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적이 있다. 그런데 매카시즘에 편승한 ‘밀고’ 행위라니.

영국 정부는 2003년 이 명단을 공개했다. 오웰이 폐결핵으로 앓던 말년의 병상 시절, 영국 정부의 정보요원 실리아 커원에게 문제의 리스트를 전달했다고 한다. 커원은 영국 외무부 산하의 정보조사부(IRD) 소속이었지만, 실은 MI6이라고 알려진 비밀정보부의 감독을 받았다. 오웰이 이 명단을 작성한 이유에 대해서는 커원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거나 공산주의자들을 몹시 경멸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오웰이 생전에 좋아했다는 찰리 채플린이 포함된 이 명단은 ‘유대인’ ‘흑인’ ‘동성애자’ 등 인종차별적이고 인권침해적인 표현이 다수 등장한다는 점에서 오웰의 명성을 깎아내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1969년생 미국 작가 존 리드가 <동물농장>을 패러디한 <자본주의 동물농장>을 쓴 이유가 오웰을 공격하기 위해서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존 리드가 오웰을 비틀겠다고 생각한 것은 알카에다의 사상 유례없는 항공기 납치 테러로 뉴욕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던 시점이었다. 오웰에게 영감을 주었던 스탈린과 소련은 이미 저세상으로 떠난 지 오래였고, 세계는 자본주의 미국의 새로운 독재체제로 재편된 상태였다.

<자본주의 동물농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선언으로 끝나는 <동물농장>의 일곱 계명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리고 <동물농장>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섯개의 계명은 모두 사라지고 마지막 계명만이 이렇게 변형된다는 것도.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평등의 기치 아래 숱한 희생을 치르고 혁명을 일으켰으나 결국 ‘돼지’라는 새로운 지배계급의 출현으로 마감한 비극의 역사를 조지 오웰은 이렇게 비꼬았다. 존 리드는 오웰의 풍자로부터 반세기의 세월이 흐른 뒤, 이 문장을 한번 더 비틀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무엇이 되느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결정한다.”

이야기는 돼지 ‘스노볼’의 귀환으로 시작한다.(이 책의 원제가 다.) 스노볼은 <동물농장>에서 옳은 말만 하다 독재자 ‘나폴레옹’에게 쫓겨난 이상주의자다. 알다시피 나폴레옹은 스탈린을, 스노볼은 트로츠키를 빗댄 것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트로츠키를 상징했던 이상주의자 스노볼. 존 리드의 <자본주의 동물농장>에서는 자본의 화신으로 돌아온다. 그림 천년의상상 제공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트로츠키를 상징했던 이상주의자 스노볼. 존 리드의 <자본주의 동물농장>에서는 자본의 화신으로 돌아온다. 그림 천년의상상 제공
나폴레옹은 벌써 죽었고, 그 뒤를 문약한 지도자 미니머스가 이어받았다. 매끈한 몸매와 화려한 말솜씨로 스노볼은 단숨에 대중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예전에 추진했던 풍차 건설 사업을 ‘쌍둥이 풍차’ 사업으로 확대해 재추진한다. 콘크리트를 부을 때 양 한 마리가 시멘트 구덩이로 떨어지고 고양이 ‘노마’가 전기에 감전돼 죽지만, “불가능한 꿈”을 꾸라는 스노볼의 독려에 곧 잊혀진다. 동물농장 주간지 <데일리 트로터>는 ‘토박이 가금(家禽) 성공하다!’라는 제목의 특별판 기사에서 통신대학의 더 높은 학위를 따려는 닭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을 보도한다. “늘 네라고 말하죠. (…) 하면 된다고 믿는 새입니다!” 풍요의 시기인 것만은 분명했지만, “돼지들이 가져온 테이크아웃 음식”이 농장 구석구석에 버려져 썩어갔고, “발 딛는 곳마다 거름 더미와 노란 웅덩이가 있었다. (…) 어디에나 진보로군! 돼지들은 말했고 시궁쥐들은 환호했다.”

스노볼은 동물농장을 개방해 ‘동물장터’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우리 삶은 편안해질 거요. (…) 우리 이윤은 커질 거요. 비용은 낮아질 거요. 지금 나무가 있는 곳에 내일이면 불빛이 있을 거요. 전깃불이 개똥벌레 천만 마리처럼 반짝거릴 거요. (…) 꿈이 실현되는 땅이 될 거요. 온수 목욕, 에어컨, 우리가 우리 꿈을 실현하지 않았소? (…) 그곳은 단지 놀이공원이 아니라 동물의 순수한 정신의 경이로운 전시장이 될 거요.”

성공가도를 달리는 듯했던 동물장터는 ‘등유 기술’로 무장한 비버들과 흰족제비, 다람쥐들의 습격을 받고 위기에 빠진다. 이들은 ‘슈가캔디 로드스타’를 믿는 삼림지대 동물들이었다. 흰족제비가 칼을 뽑아 푸들 아서의 목을 벤 뒤 회전 관람차를 손에 넣자, 종이봉투를 든 다람쥐 두 쌍이 철제 구조물을 뚫고 관람차를 고정하는 축까지 들어가 번들거리는 액체를 몸에 끼얹고 불을 붙였다. 폭발에 튕겨져 나온 “대관람차는 거칠 것 없이 언덕을 굴러 내려와 다른 언덕으로 올라갔다……. 기다리고 있는 쌍둥이 풍차를 향해.”

알카에다의 쌍둥이 빌딩 폭파를 빗댄 이 에피소드의 결론 부분에서는 낯익은 장면이 연출된다. 경찰을 상징하는 개들이 마스크를 나누어주는 동안 기술자 염소는 이렇게 말한다. “걱정할 것 없다. 위험하지 않다.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 된다. (…) 그때 두 번째 쌍둥이 풍차가 그들의 머리 위로 무너졌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죽었다.”

풍자의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2002년 미국에서 출간된 책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고 한다. 오웰이 영미권에서 갖는 상징적 위상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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