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총독부 헐면서 ‘감격시대’ 연주하다니

등록 2015-07-02 20:28수정 2015-08-04 16:14

희망봉은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
일본군 난징 함락 축하하는 노래
음악평론가 강헌 첫 저술
음악의 역사를 교향곡처럼 연주
전복과 반전의 순간
강헌 지음/돌베개·1만5000원

“희망봉은 멀지 않다 행운의 뱃길아.” 박시춘이 작곡하고 남인수가 부른 ‘감격시대’(1939)는 이렇게 끝난다. “여기서 희망봉은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이다. (…) 일본의 황군은 이 노래가 발표되는 시점에 난징을 돌파하고 (…) 싱가포르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난징의 함락과 황군의 연승을 축하하는 노래다.”

1995년 8월15일 김영삼 정부는 식민 잔재를 청산한다며 총독부(당시 중앙청) 건물을 폭파했다. 그런데 같은해 8·15 기념식장에서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울려퍼진 노래가 ‘감격시대’였다. “그 기념식은 NHK방송국에서 일본으로 생중계를 하고 있었다. 만약 프랑스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그 대통령은 하야했을 것이다. 프랑스 독립기념일에 나치의 노래를 연주한 것과 같은 맥락이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무지가 빚어낸 웃지 못할 촌극이다.

신중현은 ‘국민건전가요’를 작곡해 달라는 박정희 정권의 요청을 거절했다가 “앞으로 나올 모든 작품까지” 금지당하는 수난을 겪는다. ‘아름다운 강산’을 비롯해 건전가요로 가득 채운 신중현과 엽전들 2집. 최고권력을 상징하는 경복궁 근정전 계단에 서서 정장 차림으로 부동자세를 취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돌베개 제공
신중현은 ‘국민건전가요’를 작곡해 달라는 박정희 정권의 요청을 거절했다가 “앞으로 나올 모든 작품까지” 금지당하는 수난을 겪는다. ‘아름다운 강산’을 비롯해 건전가요로 가득 채운 신중현과 엽전들 2집. 최고권력을 상징하는 경복궁 근정전 계단에 서서 정장 차림으로 부동자세를 취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돌베개 제공
음악은 시대라는 악보 위에 그려진 음표가 아닐까. 음악사를 이해하려면 그 악보의 흐름을 꿸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평론가 강헌은 탁월한 지휘자다. <전복과 반전의 순간>에서 그는 강렬한 카리스마의 카라얀처럼 악보 전체를 장악하고 적재적소에 악기들을 불러내 음표를 가지고 놀듯이 연주한다.

지휘자 강헌이 선택한 서곡은 재즈다. 미국에 필리핀과 괌, 푸에르토리코를 안겨준 미국-스페인 전쟁이 끝난 뒤, 병참기지 구실을 했던 뉴올리언스에 폐기 대상인 군수물자들이 쌓이는데, 거기에 군악대의 악기가 섞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갖고 다니기 쉬운 관악기를 흑인들이 집어들게 된다. “일단 흑인들은 기본적으로 입술이 두꺼워 관악기를 연주할 때 굉장히 안정감이 있었다. 게다가 가슴통이 두꺼워 폐활량이 크다. 어지간해서는 불기 어려운 관악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는 신체적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재즈는 블루스와 가스펠을 낳았고, 스윙과 비밥, 리듬앤블루스와 로큰롤로 이어진다. 재즈와 로큰롤은 역사적인 공통점이 있는데, 처음으로 소수자의 문화가 주류로 등극한 혁명적 사례라는 점이다. 흑인에게 재즈가 있듯이, 미국 중산층 10대들에게 로큰롤이 있었다. 기성세대는 로큰롤의 양아치 스타일을 보자마자 그 저항성을 감지한다. “로큰롤은 사탄의 음악”이라고 규정하고 연방수사국(FBI)까지 동원해 대대적인 로큰롤 탄압을 시작한다. 숱한 흑인 뮤지션들이 잡혀갔고, 방송국에서 로큰롤과 리듬앤블루스를 틀었던 피디 300여명이 상원 청문회에 소환돼 2년 동안 시달렸다. 해고자도 속출했다.

하지만 권력의 탄압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지는 못한다. ‘대학생의 얼굴을 한 양아치’ 비틀스와 ‘양아치 차림의 대학생’ 롤링스톤스의 등장으로 역사의 간지(奸智)는 실현된다. 10대라는 마이너리티가 새로운 문화의 주류로 등극한 것이다.

강헌이 한국 음악사상 최고의 앨범 재킷으로 꼽은 한대수 2집 <고무신>.  돌베개 제공
강헌이 한국 음악사상 최고의 앨범 재킷으로 꼽은 한대수 2집 <고무신>. 돌베개 제공
‘전복과 반전’은 한국에서도 일어난다. 강헌은 그 기점을 1969년 9월19일로 본다. 남산 드라마센터(옛 서울예전)에서 한 장발 청년이 자신이 만든 톱과 징 등 이상한 악기들을 펼쳐놓고 혼자서 노래를 부른 날이다. 이 청년이 한대수다. 그는 한국 대중음악사에 출현한 첫 싱어송라이터였다. 한대수 공연 닷새 전인 9월14일 대한민국 국회는 3선개헌을 의결하고 박정희 독재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를 남발하며 문화 학살을 시작하는데 그 대표적인 희생양이 한대수와 신중현이었다.

재미있는 일화가 많지만 그중 하나가 1973년 신중현이 <선데이 서울>에 쓴 ‘신중현의 해피스모크 탐방기’라는 글이다. 마리화나(대마초)를 피우며 환각 상태에 이르는 과정을 실명으로 썼다. 초창기 <선데이 서울>에는 소설가 김승옥이 연재하는 등 격조 있는 글들이 많이 실렸고, 당시만 해도 대마초가 불법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강헌의 통찰은 책의 곳곳에서 빛난다. ‘사의찬미’를 남기고 자살한 윤심덕의 죽음에 타살 의혹을 제기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본주의는 왜 이렇게 죽음에 열광하는가. 자본주의의 핵심은 대량생산과 대량복제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복제한다. (…) 하지만 전지전능한 자본주의가 복제할 수 없는 마지막 단 한가지는 바로 죽음이다. (…) 그러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죽음이야말로 복제본이 없는 유일한 원본인 것이다. 그 복제 불가능한, 단 하나뿐인 원본에 자본주의의 대중들이 무의식적으로 열광하는 게 아닐까.”

신기하게도 이 책은 강헌의 첫 저술이다. 그의 백과사전적 관심은 대중음악만이 아니라 클래식에까지 뻗쳐 있다. 바흐와 헨델,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독창적으로 해석하는 3장 ‘클래식 속의 안티 클래식’만으로도 훌륭한 음악 교과서다. 강헌은 시대와 사람과 정치와 경제를 음악이라는 용광로에 쏟아부어 장쾌한 교향곡을 정련해 냈다. 이 책은 ‘음악의 역사’로 읽히기보다 ‘역사의 음악’으로 들린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괴물이 되어서야 묻는다, 지금 내 모습을 사랑해 줄 수는 없냐고 1.

괴물이 되어서야 묻는다, 지금 내 모습을 사랑해 줄 수는 없냐고

구준엽 아내 서희원 숨져…향년 48 2.

구준엽 아내 서희원 숨져…향년 48

인상파 대가 오지호 명작 ‘사과밭’과 ‘남향집’의 엇갈린 뒤안길 3.

인상파 대가 오지호 명작 ‘사과밭’과 ‘남향집’의 엇갈린 뒤안길

“알고 보면 반할 걸”…민화와 K팝아트의 만남 4.

“알고 보면 반할 걸”…민화와 K팝아트의 만남

조성진 ‘가장 바쁜 피아니스트’ 5위…서울은 가장 뜨거운 음악도시 5.

조성진 ‘가장 바쁜 피아니스트’ 5위…서울은 가장 뜨거운 음악도시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