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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속물도, 운동권도 아닌, 아웃사이더가 머물 곳은 어디에?

등록 2015-10-15 22:56수정 2015-10-16 15:45

강석경과 이문열의 80년대 소설들은 속물적 세계와 변혁운동 양쪽 모두에 거리감을 느끼던 ‘회색인’들의 고독과 소외감을 파고들었다. 사진은 이문열 소설 <구로아리랑>을 각색한 1989년 영화 <구로아리랑>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강석경과 이문열의 80년대 소설들은 속물적 세계와 변혁운동 양쪽 모두에 거리감을 느끼던 ‘회색인’들의 고독과 소외감을 파고들었다. 사진은 이문열 소설 <구로아리랑>을 각색한 1989년 영화 <구로아리랑>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광복 70년 책읽기 70년] ⑫ 80년대 후반 : 개인과 집단주의의 갈등
생각해보면, 세계사적 차원에서 80년대 후반 한국의 운동 열기는 뜻밖의 현상이었다. 이 시절은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중국의 천안문, 동유럽의 격동 등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던 때였다. 그렇지만 당대 운동세대들은 “더 많은 사회주의로서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운위할 만큼 낙관적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급진적 변혁 운동이 꿈꾼 전망의 최종심급에는 현실에서 도그마화된 사회주의 이념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급진화된 운동 풍토에서 사민주의나 서구의 신좌파 등은 개량주의, 소시민주의라는 이름으로 간단히 도외시되었다. 영어가 쓰인 티셔츠와 한 잔의 콜라가 비난받던 시절, 개성의 추구는 즉각적으로 부르주아 개인주의와 리버럴리즘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87년을 전후하여 공동체주의는 그 정점에 올랐지만, 그 저류에서는 억압된 개인성에 대한 강한 희구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었다. ‘개인’과 ‘내면’으로의 회귀는 90년대 들어서 갑자기 돌출한 것이 아니다.

■ ‘회색인’의 방황과 좌절? 강석경 ‘숲속의 방’

강석경의 <숲속의 방>(1986)은 80년대 집단주의와 개인성의 갈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민음사의 ‘오늘의 작가상’ 제10회 수상작인 이 소설은 대학가에서 애독되며 86년도의 베스트셀러가 된다. 작품은 부르주아 가정의 셋째 딸인 불문과 대학생 ‘소양’이 자신의 환경을 수락하지도 운동 집단에 속하지도 못하고 정신적 방황을 하다가 자살에 이르는 과정을 서술자인 언니 ‘미양’이 추적하는 형식을 취한다.

비틀스의 패널이 걸려 있는 그녀의 ‘방’ 낡은 전축에서는 레너드 코언의 ‘파르티잔’이 흘러나오고 ‘소양’은 보들레르와 카뮈를 읽어가며 유미적인 자기 세계에서 살아간다. “신문지상에 일단짜리 학원 기사가 시대의 밑반찬으로 연일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대학생이 되고부터 그녀의 방황은 본격화한다. 부유한 속물적 부모에게 반항하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거부하지만, 그렇다고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투신하지 못하는 그녀는 어디에도 동일화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이다.

그녀는 자신 속의 부르주아적 속성을 부수고 싶어 호스티스가 되는가 하면, 삶의 진실을 채워줄 ‘무엇’인가를 찾아 종로의 밤거리를 헤매다닌다. 결국 그녀는 집단주의라는 ‘숲의 아우성’ 속에서 안식할 수 있는 진정한 개인의 ‘방’을 찾아 헤매다 좌절하고 만다. “운동하는 건 좋은데 다른 고통, 갈등도 포용하고 인정해야 한다. 너희들만 의식 있는 인간이고 진실하다고 생각하는 건 오만이고 너희들이 대항하려는 체제만큼 비인간적”이라는 그녀의 항변은 80년대 운동이 억압하고 있던 또 다른 목소리를 들려준다. 실제 86년도에 “5월은 회색인으로 살아가기는 어려운 달”이라는 말을 남기고 한강에서 투신자살한 서울대 국문과 4학년생 박혜정은 현실 속의 ‘소양’으로 회자되었다.

구로동맹파업에 참여했던 ‘학출’ 노동자 서혜경의 기억은 운동권 속에 실재했던 ‘소양’의 면모를 보여준다. 중산층 가정의 딸로 서울대 사대에 다니다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그녀는 “잠잘 때 잠옷을 갈아 입었고, 파마를 해도 빠글빠글하게 못했으며, 책이란 책은 다 버리고 최소 생필품만 갖고 살면서도 셰익스피어 작품인 <햄릿>과 스타인벡이 쓴 <생쥐와 인간>이라는 문고판을 한구석에 끼고 살았다”며 이른바 투철한 민중성과 불화하던 자신의 취향이 ‘계급적 징표-원죄’처럼 간주되었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80년대 운동권 안팎에는 무수한 ‘소양’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셈이다.

87년 정점에 오른 공동체주의
영문 티셔츠·콜라 한잔에도 눈흘김
그 저류엔 짓눌린 개인성

부르주아 부모와 불화하고
운동에도 투신 못한 여대생은
‘숲속의 방’을 찾아 헤매고
시대와 불화한 또다른 대학생들은
이문열의 소설에 열광했다

사랑에 주린 이는 비판 무릅쓰고
‘홀로서기’ ‘접시꽃 당신’ 등
시집을 끼고 다녔더랬다

■ ‘87년’의 또 다른 주인공 (1) - 이문열

1980년대는 이문열의 시대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문열은 <사람의 아들>(1979) 이후 <그해 겨울>(1980),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1981), <젊은 날의 초상>(1981), <어둠의 그늘>(1982), <황제를 위하여>(1982), <금시조>(1983), <레테의 연가>(1983), <영웅시대>(1984), <요서지>(1986), <구로아리랑>(1987),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8), <변경>(1988), <필론의 돼지>(1989) 등 거의 매년 소설집 및 장편을 출간했고 간행된 작품마다 화제를 몰고 왔다.

80년대 내내 그의 소설은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빠지지 않았는데, 특히 거리의 열기가 최고조였던 1987년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레테의 연가> <젊은 날의 초상>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이 한꺼번에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제는 이문열의 발언에 귀 기울이는 이가 많지 않지만, 90년대 중반까지도 그는 여러 독서 관련 설문에서 선호하는 국내 작가 1위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80년대 이문열이 이토록 열독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문열 작품에 대한 뜨거운 반응은 풍부한 이야기성, 독특한 문체 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특히 이 글의 관심에 국한해서 생각해보면, 이문열 소설의 주인공이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와 태도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도 있겠다. 이문열의 주인공들은 ‘시대와의 불화’-타락하고 비속한 세계와 결국 거기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냉소와 비하가 뒤섞인 감정을 표출한다. 그의 주인공들은 진정성을 추구하며 속물적인 주류적 가치와 운동과 이념의 집단적 도그마 양쪽 모두와 불화하는, 고유한 개별성이 강조되는 ‘아웃사이더’이다. 80년대의 독자들은 이 냉소와 자기비하라는 변형된 나르시시즘적 교양이 풍기는 정조에 열렬히 반응했다.

한 대학생의 정신적 방황과 성숙을 그린 <젊은 날의 초상>은 나르시시즘적 현학과 아웃사이더적 특징이 잘 드러나 있는 소설이다. 주인공 영훈의 고통스런 방황과 성숙의 서사는 오랜 세월 한국 청소년들의 필독서였던 <데미안>의 ‘싱클레어’의 고뇌와 성장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어쩌면 독자들은 개인의 실존과 진정성을 추구하는 이문열의 주인공들에게서 대체불가능한 개인성의 표지를 호흡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나친 현학과 관념성에 가려져 있지만, 이 소설이 보여주는 정치와 운동에 대한 냉소와 환멸도 각별히 강조될 필요가 있다. 소설의 시간은 4·19의 전설이 여전히 캠퍼스를 뒹굴고 있으며 3선 개헌 반대 운동이 시작될 1969년 전후 즈음이다. 소설의 인물들은 이러한 60년대적 운동의 흐름에 잠깐 몸담은 듯하지만 곧 ‘참여’와 ‘민중’의 개념에 냉소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이 작품은 전공투 세대의 좌절 이후 상실의 아픔과 삶의 허무를 다룬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1989)의 구도 및 감수성과도 비슷한 측면을 갖고 있다.

■ 또 다른 주인공 (2) - 서정윤의 ‘홀로서기’

87년도 최대의 베스트셀러는 서정윤의 <홀로서기>와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이다. 88년에도 베스트셀러의 1, 2, 3위를 <홀로서기>, <마주보기>(에리히 케스트너), <접시꽃 당신> 등 3권의 시집이 석권하는 시 선풍이 이어졌다. 인문분야 베스트셀러 20위까지의 총 판매부수가 <홀로서기>와 <마주보기>를 합한 것보다 적을 정도였다. <홀로서기>는 88년의 10대 인기상품 중에 책으로는 유일하게 포함되었으며, 현재까지 대략 330만부 정도가 팔린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홀로서기>의 인기로 출판서점가에서는 “‘기’자 돌림책 출간 홍수”(경향신문, 1988. 11. 26)가 발생했다. ‘돌아서기’, ‘거듭나기’, ‘다시나기’, ‘사랑쌓기’, ‘껍질깨기’ 등 ‘기’자로 끝나는 책이 30종이 넘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홀로서기>는 교향악곡으로 작곡되었으며 무용극으로 꾸며지기도 했다. 조용필의 <비련>의 첫 소절 “기도하는”에 “꺅-” 하는 기성을 지르는 팬들마냥, 80년대의 많은 청춘들은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로 시작하는 <홀로서기>의 사랑의 구절들에 열렬하게 반응했다. 연애편지에 인용되고, 책받침과 공책, 각종 팬시 문구에 소녀의 얼굴과 함께 이 구절들이 인쇄되어 유통되었다.

당대의 평가는 어떠했을까? 그 시대는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을 논평하면서 “아내와 자식이 등장”하는 시에 ‘사적 언어’가 두드러진다는 것은 박노해 시세계의 옥에 티에 해당한다면서 이것이 “자칫 소시민화의 단서가 될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비평이 이루어지던 때였다. 그런 시대에 개인적인 사랑의 감정을 읊은 연작시인 <홀로서기>에 대한 가혹한 비평은 예견되는 것이다. <홀로서기>는 아예 논평의 대상이 되지 않거나, ‘감미로운 사랑 얘기’ 혹은 ‘사춘기의 정서를 오도’하는 상업적 삼류시로 비판되었다.

1985년의 이해인 수녀의 시, 87년의 <홀로서기>, <접시꽃 당신>, 88년의 <마주보기>로 이어지는 서정시 열풍은 왜 일어났을까? 가령 우리는 이러한 현상의 다른 사례로 대중가요 분야에서 등장한 동아기획의 음반들을 떠올릴 수도 있다. 들국화, 봄여름가을겨울, 신촌블루스, 김현식, 시인과 촌장, 유재하, 박학기, 장혜진, 김현철 등 동아기획의 ‘언더그라운드’ 음악들은 87년을 전후하여 팝송과 트로트와는 다른 감수성의 지형을 그리며 등장했다. 서정시 붐과 이들 음반은 80년대 공동체주의의 열기를 보완하고 있던 개인적 서정의 영역을 환기시킨다.

■ 공동체주의와 개인성의 조화를 꿈꾸며

집단주의와 개인성을 대립시켜 전자의 억압성을 비판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이 둘은 대립적이기만 할까? 사회주의의 비전을 포함한 1980년대의 공동체주의의 사상적 실천적 모색은 한국 사회에 ‘공공성’의 영역과 연대의 감각을 정착시켰다.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공동체주의가 제기해온 연대/공공성의 지향과 함께 개인성이 동시에 추구되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모순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우리는 조금 더 ‘개인주의’적이어야 하며, 동시에 더욱 ‘공동체주의적’이어야 한다. 공공성과 연대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개인성에 대한 옹호를 조화롭게 결합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80년대가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이자 화두가 아닐까?

정종현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인문한국(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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