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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외치거나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나서거나

등록 2015-11-12 20:22수정 2015-11-13 10:00

1990년대 베스트셀러나 문제작들의 제목에는 유독 ‘나’가 많이 들어갔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내게 거짓말을 해봐> 등이다. ‘나’의 체험과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졌던 시대였다. 사진은 장정일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1990년대 베스트셀러나 문제작들의 제목에는 유독 ‘나’가 많이 들어갔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내게 거짓말을 해봐> 등이다. ‘나’의 체험과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졌던 시대였다. 사진은 장정일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광복 70년, 책읽기 70년]
(14) 베스트셀러로 살펴본 90년대 개관
90년대 최고의 상품은 ‘나’(개인)였다. ‘세상의 중심은 나’라고 주장하는 다양한 종류의 광고 카피들이 90년대를 풍미했다. 베스트셀러와 문제작들에도 유독 ‘나’가 들어간 제목이 많았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장정일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와 서갑숙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에 이르기까지, ‘나’의 체험을 강조하고 금지되었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미덕처럼 여겨졌다. 바야흐로 갇혀 있던 욕망이 풀려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 자기계발과 성공서사의 시대

김우중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1989)는 89, 90년 두 해에 걸쳐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80년대의 끝자락에서, 청년들을 타깃으로 상정한 이 책의 인기는 90년대가 어떤 시대가 될지를 암시하는 듯하다. 80년대적인 이념을 낡은 것으로 만들면서 김우중은 큰 세계를 무대로 성공하라며, 청년들의 욕망을 자극했다. 마치 김우중에게 호응하듯이, 90년대 초반 이후 유학과 어학연수, 해외여행이 급속도로 늘었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꾸라”는 이건희의 말은 자기 혁신의 표상으로 대접받았고, 급기야 그는 젊은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혔다. 운동의 적이었던 성공한 자본가가 위인이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내 아들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1989) <사랑과 비즈니스에는 국경이 없더라>(1990) 등과 같은 논픽션들이 90년대 벽두부터 베스트셀러가 되고,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1994)과 같은 자기계발서가 90년대 후반까지 지속적인 인기를 끈 것도 성공의 욕망이 시대의 정서가 되었음을 일러준다.

90년대 초반 출판시장을 휩쓴 <소설 동의보감>(1990) <소설 토정비결>(1991) <소설 목민심서>(1992) 등의 역사인물소설도 실질적으로는 자기계발서의 역할을 했다. 천첩 출생으로 정1품 보국숭록대부에 양평군이라는 작호까지 받았던 허준의 일대기를 그린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은 성공 욕구를 지닌 한 인간의 자수성가의 드라마이기도 했다. 한의학적 지식이 버무려진 이 성공의 이야기는 400만부가 팔려나가며 24년간 쌓였던 창작과비평사의 적자를 청산하는 ‘명의’ 노릇을 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에 허준이 있었다면, 현대에는 이명박이 있었다. 이명박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1995)는 노점상의 아들로 태어나 포항 달동네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학생회장으로 6·3시위를 주도하다 복역 후 현대건설 등 여섯 개 계열사 회장을 거쳐 국회의원이 된 이명박의 입지전적 일대기를 그린 책이다. 제목과 달리, 자신을 한국 현대사의 ‘신화’로 구성한 이 책은 90년대에만 60만부가 팔렸다. 이 책이 만든 허상의 ‘신화’ 때문에 한국의 산하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에 지금도 신음하고 있다.

90년대 최고 상품은 ‘나’
나의 체험을 강조하고
금지되었던 욕망을 드러내

김우중·이건희 성공스토리 등
사람들 성공욕망에 불지피며
자기계발서가 지속적 인기

문학작품선 ‘자아찾기’ 주제
상실·허무·절망의 정서 배경
쥐스킨트 작품이 강타하기도

테크놀로지 급발전 시대답게
‘컴퓨터 길라잡이’ 등
디지털 전도서가 베스트셀러에

■ 또 다른 ‘나’-피투성이 자아를 찾아서

90년대에는 잃어버린 자아 찾기를 주제로 한 문학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를테면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1994)은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귀’를 희구하는 다양한 개인들을 묘사하며 90년대적 주제의식을 가시화했다. 그러나 90년대의 ‘나’는 박래품이거나 돌출한 상품이 아니다. 말쑥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그 자아의 속살에는 지난 시대(와)의 고투를 거친 피투성이 상처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공지영의 <고등어>(1994)와 같은 후일담 소설은 그 피투성이 상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작가는 바다를 헤엄쳐 다니는 등푸른 고등어처럼 80년대를 힘차고 자유롭게 살아낸 청춘들이 이념이 사라진 90년대 들어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모습을, 배가 갈리고 내장이 뽑혀져 나간 채 소금에 절여져 좌판에 던져져 있는 형상으로 비유했다. 이런 상실과 절망의 정서는 일본 전공투 세대의 후일담 격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읽혔던 배경이기도 하다.

고유한 ‘자아’에 대한 추구, 상실과 허무, 절망의 정서가 세트 메뉴처럼 갖춰진 것이 90년대 중반 독서계를 강타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작품들이다. 쥐스킨트의 <좀머씨 이야기>는 ‘광복 후 가장 많이 팔린 책 50권’에 이름을 올리고 <향수> <콘트라베이스> <비둘기>로 이어진 쥐스킨트 현상은 ‘경제지가 뽑은 96년 히트상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과거의 기억과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좀머씨는 “그러니 제발 나를 좀 내버려두란 말이오!”라는 신음 같은 한마디를 남기고 석양의 호수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간다. 절망으로부터 벗어나려 끝까지 치열하게 노력하다가 호수로 사라져간 좀머씨의 최후는 역설적으로 상처입고 지친 많은 독자들에게 ‘살아라’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 세계화의 역설-‘민족주의’ 자극하는 책읽기

9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김영삼 정권의 화려했던 ‘세계화’ 구호를 기억할 것이다. 94년 연두교서 이래 김영삼 정권 내내 권력의 나팔수들은 세계화의 구호를 떠들어댔다.(그 끝이 IMF체제였던 것은 희비극의 느낌을 준다.) 요란한 세계화 구호를 비웃기라도 하듯 출판가에서는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출판물들이 인기를 끌었다.

임권택 감독은 1993년 영화 <서편제>를 제작하여 100만을 훌쩍 넘긴 관객을 동원했다. 영화의 성공에 발맞춰 열림원은 이청준의 원작 <서편제>를 포함한 8편의 단편을 묶어 소설집 <서편제>로 간행하여 100만부 이상을 판매했다. 언론은 <서편제> 열풍을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며 세계화 담론으로 치장했다.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1993)는 반일(반미) 민족주의를 자극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은 박정희 시대 핵 개발에 참여한 천재 물리학자 이용후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쫓는 가상의 역사추리소설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개입한 이용후의 죽음, 청와대 코끼리상에 숨겨진 인도에서 수입한 플루토늄, 남북 공동의 핵개발과 일본과의 전쟁, 핵무기 투하로 이어지는 이 소설의 핵민족주의는 대중의 내셔널리즘 정서를 강하게 자극했다.

이 소설이 94년에 연재되었던 이현세의 만화 <남벌>과 동일한 설정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일본의 초고도 레이더망을 피할 수 있는 북한의 AN-2기에 남한의 특공대를 실어 레이더망을 파괴하고 일본을 향해 미사일이 일제히 날아가는 <남벌>의 결말에서 독자들은 김진명 소설의 핵무기 투하 장면과 동일한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남북한이 연합하여 일본을 징벌하는 이들 대중서사는 민족심리 깊숙이 각인된 르상티망(원한)을 자극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여기에 표절로 판명된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1993)가 누린 인기까지 곁들이면, 90년대 중반 한국은 온통 반일 정서로 뒤덮였던 것처럼 느껴진다.

현실은 어떠했을까? 한반도발 핵미사일이 일본 본토를 유린하는 <남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바람과 달리 현실에서는 일본 대중문화라는 문화적 미사일이 거꾸로 한국으로 날아왔다. 전여옥이 ‘없다’고 외치던 일본의 문화는 1998년 문화개방과 더불어, 아니 그 이전부터 한국 청소년들의 일상 문화를 잠식하고 있었다. 반일 내셔널리즘의 대중서사에 노출된 90년대의 바로 그 아이들은 동시에 <에반게리온> <카우보이비밥> <공각기동대> 등의 세련된 일본 애니메이션에 열광했고, <꽃보다 남자> <슬램덩크> 등의 일본 만화를 탐독하며, ‘의식의 반일과 일상의 친일’이라 할 만한 분열된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었다.

■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베스트셀러

90년대 가장 성공한 책 중 하나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이다. 이 책은 1년 동안 50만부가 판매되었고, 60주 연속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이후 이 시리즈는 전국 방방곡곡을 거쳐 북한편을 다룬 뒤 현재는 일본편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책의 성공 요인은 우선 “석양머리 적막강산”에서 “몇천년 동안 잠든 보물들이 깨어나 찬란한 잔치를 베풀기 시작”하게 하는 유홍준의 혜안과 스토리텔링의 능력, 그리고 교과서에 실릴 정도의 유려한 문체에서 찾을 수 있다.

어떤 이는 ‘민족사에 대한 총체적 인식’ 혹은 ‘민중에 대한 애정’을 이 책의 성공 비결로 꼽기도 하지만,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물질적(기술적) 배경으로 ‘마이카 시대’의 개막을 고려해야만 한다. 94년 8월의 한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자동차 보유 대수는 700만대를 돌파했다. 장정일의 시니컬한 표현을 빌리자면, “카섹스를 빼고 자동차를 구입한 중산층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도시 근교나 시골로 전원주택 지을 땅을 구경 다니는 일”이었는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이런 중산층의 주말 자동차 놀이문화에 내려진 지적인 복음이었던 셈이다.

돌이켜 보면, 90년대는 테크놀로지의 변화가 눈부신 시대였다. 컴퓨터의 발전과 더불어 <컴퓨터, 일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1995) <컴퓨터 길라잡이>(1995) 같은 실용서와 빌 게이츠의 <빌 게이츠의 미래로 가는 길>(1996) <빌 게이츠@생각의 속도>(1999)와 같은 디지털 전도서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무엇보다 피시통신의 저변이 확장되어 본격적인 사이버 시대의 막이 열렸다. 하이텔에 연재되어 인기를 끌고 정식 출판되어 1000만부가 넘게 팔린 이우혁의 <퇴마록>(1994), 한국의 장르 판타지 문학의 개척자로 일컬어지는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1998)를 비롯하여 김호식의 <엽기적인 그녀>(2000) 귀여니의 <그놈은 멋있었다>(2001) 등이 온라인의 인기에 힘입어 현실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사례이다. 이제 세상은 새로운 자연계인 사이버-인터넷의 세계로 이동하고 있었다.

정종현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인문한국(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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