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핸드 타임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하은 옮김/이야기가있는집·1만5800원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70년 만에 해체됐다. 1991년 일이다. 바로 그해부터 2012년까지 20년간 한 벨라루스 기자는 ‘소비에트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길거리에서, 부엌에서, 열차에서, 외국에서, 도시노동자를, 촌로를, 전직 소련군 합참의장을, 비밀요원 출신을. 그는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68)다.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첫 노벨문학상 수상자, 소련 해체 후 처음 나온 독립국가연합(CIS) 출신 수상자. 지은이의 5번째 책이자 최근작인 <세컨드핸드 타임>(2013)은 그의 노벨상 수상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우편배달부가 대문을 열더니 말하더군요. ‘소식 들으셨어요? 공산주의자들이 더 이상 없다는 소식이요.’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공산당이 해체됐어요.’” 졸지에 ‘없어진 공산주의’의 혼란, 바라던 자유 대신 들이닥친 내전과 자본주의. 소비에트는 사라졌어도 소비에트인은 사라지지 않고 저 20년을 통과했다. 그들의 기억, 감정, 의견을 생중계하는 이 책은 소련 이후의 추세를 담고 있다. 어쩌면 판세도. 2011년 12월 볼로트나야 광장엔 수십만명이 모여 ‘공정한 선거와 권력’을 요구하며 부정선거 반대시위를 했다. 그 뒤로도 시위는 끊이지 않고 있다. 인터뷰는 20개의 실화로 묶였다. 점점이 빼곡한 질문과 대답. 시, 소설, 극뿐이던 문학이 형식의 틀을 깨면서 스스로 상상력을 증명한 바로 그 장르다. 한국어판으로 650쪽이 넘는 ‘고백체’ 내지 ‘수다체’가 미끄러지듯 읽히는 건 ‘현실’의 힘이고 알렉시예비치의 힘. 기자인 지은이는 사실보다, 진실보다, 현실을 받아쓴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물론 현실은 제대로 알 수 없는데다 마주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현실에서 확실하게 붙잡을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건 고통이다.” 소련 해체 뒤 자살자가 속출해 총소리가 멎지 않았다는 증언, 글을 쓰면 손을, 발언을 하면 입을 쏴 죽이던 시절. 인터뷰이들은 공통적인 고통을 꺼내놨다. 러시아인들은 “항상 전쟁 중이거나 전쟁을 준비해왔다.” 평화와 자유를 원했지만 “자유라는 무거운 짐 때문에 등이 굽고 말았다. 아무도 자유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운 것이라고는 자유를 얻기 위해 죽는 방법밖에 없었다. (…) 자유는 알고 보니 러시아에서 줄곧 모욕을 당해온 속물근성이 회생한 것이었다.” 차르의 그림자가 비치고 91년 이전을 그리워하는 이도 적지 않은 지금의 러시아에 공산주의 시대 강제수용과 민족분쟁의 참상을 복기하는 지은이는 불편한 존재다. 작가로 잘 인정하지도 않았다. 이 책은 출간 3년 만에 35개국에서 읽히고 있다. 러시아를 포함해.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하은 옮김/이야기가있는집·1만5800원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70년 만에 해체됐다. 1991년 일이다. 바로 그해부터 2012년까지 20년간 한 벨라루스 기자는 ‘소비에트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길거리에서, 부엌에서, 열차에서, 외국에서, 도시노동자를, 촌로를, 전직 소련군 합참의장을, 비밀요원 출신을. 그는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68)다.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첫 노벨문학상 수상자, 소련 해체 후 처음 나온 독립국가연합(CIS) 출신 수상자. 지은이의 5번째 책이자 최근작인 <세컨드핸드 타임>(2013)은 그의 노벨상 수상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우편배달부가 대문을 열더니 말하더군요. ‘소식 들으셨어요? 공산주의자들이 더 이상 없다는 소식이요.’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공산당이 해체됐어요.’” 졸지에 ‘없어진 공산주의’의 혼란, 바라던 자유 대신 들이닥친 내전과 자본주의. 소비에트는 사라졌어도 소비에트인은 사라지지 않고 저 20년을 통과했다. 그들의 기억, 감정, 의견을 생중계하는 이 책은 소련 이후의 추세를 담고 있다. 어쩌면 판세도. 2011년 12월 볼로트나야 광장엔 수십만명이 모여 ‘공정한 선거와 권력’을 요구하며 부정선거 반대시위를 했다. 그 뒤로도 시위는 끊이지 않고 있다. 인터뷰는 20개의 실화로 묶였다. 점점이 빼곡한 질문과 대답. 시, 소설, 극뿐이던 문학이 형식의 틀을 깨면서 스스로 상상력을 증명한 바로 그 장르다. 한국어판으로 650쪽이 넘는 ‘고백체’ 내지 ‘수다체’가 미끄러지듯 읽히는 건 ‘현실’의 힘이고 알렉시예비치의 힘. 기자인 지은이는 사실보다, 진실보다, 현실을 받아쓴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물론 현실은 제대로 알 수 없는데다 마주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현실에서 확실하게 붙잡을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건 고통이다.” 소련 해체 뒤 자살자가 속출해 총소리가 멎지 않았다는 증언, 글을 쓰면 손을, 발언을 하면 입을 쏴 죽이던 시절. 인터뷰이들은 공통적인 고통을 꺼내놨다. 러시아인들은 “항상 전쟁 중이거나 전쟁을 준비해왔다.” 평화와 자유를 원했지만 “자유라는 무거운 짐 때문에 등이 굽고 말았다. 아무도 자유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운 것이라고는 자유를 얻기 위해 죽는 방법밖에 없었다. (…) 자유는 알고 보니 러시아에서 줄곧 모욕을 당해온 속물근성이 회생한 것이었다.” 차르의 그림자가 비치고 91년 이전을 그리워하는 이도 적지 않은 지금의 러시아에 공산주의 시대 강제수용과 민족분쟁의 참상을 복기하는 지은이는 불편한 존재다. 작가로 잘 인정하지도 않았다. 이 책은 출간 3년 만에 35개국에서 읽히고 있다. 러시아를 포함해.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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