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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박지원도 열여덟엔 ‘방콕 폐인’으로 지냈단다

등록 2016-01-28 19:05수정 2016-01-29 11:34

그림 창비 제공
그림 창비 제공
칩거시절 연암의 글에서 찾은
마음의 문 닫은 십대 치유법
연암이 나를 구하러 왔다
설흔 지음/창비·1만1000원

<열하일기>를 남긴 연암 박지원은 한때 집에 틀어박힌 ‘은둔형 외톨이’였다. 친구 많고 세상 나돌기를 좋아한 연암이? 첫번째 은신은 열여덟살 때였다. “밥을 잘 못먹고 잠을 잘 못 자는 병”으로 무얼 해도 시들했다. 그를 방 밖으로 꺼낸 건 식욕을 돋우고 잠을 부르는 신기한 이야기 선생 민옹이었다.

‘미노’도 열여덟을 지나 열아홉이 되도록 ‘방콕’이다. 주방 뒤쪽의 다용도실과 베란다 공간을 합쳐 만든 방 한구석에 놓인 드럼세탁기 옆이 칩거장소다. 3개월 진한 우정을 나눈 유일한 친구에게서 느낀 배신감, 자신을 괴롭히고 폭력을 휘두른 녀석에게 합의해준 아버지에 대한 분노, 야구선수의 꿈이 좌절된 절망 등이 얽혀 틀어박힌 지 2년이다. 민옹의 환생일까? 어느 날 미노에게도 거구의 이빨 빠진 이야기 선생이 찾아왔다. 방에서 무조건 꺼내려는 상담사, 사회복지사, 교회 여성전도회 회장과는 달리 그는 미노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등떠밀지 않는다. 대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박지원과 폐인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로 제1회 창비청소년도서상 대상을 받은 저술가 설흔이 박지원의 글에서 마음의 문을 닫은 십대들의 마음 치유법을 찾아냈다. <연암이 나를 구하러 왔다>는 황해도 연암협에 은신했던 시절 연암의 글을 현대인의 시선으로 변용해 성적 고민과 가족갈등, 왕따 등으로 자기만의 동굴로 피신한 청춘들에게 용기를 준다.

책 말미까지 긴 서문 형식을 취하는 구성이 특이한데, 미노의 내면 깊은 곳의 상처의 뿌리를 조심스레 드러내는 데 유용해 보인다. 미노의 이야기와 이야기 선생이 전하는 박지원 일화가 켜켜이 쌓일수록 미노 마음 속에선 “성우야 빨리 나와” 하는 그리운 목소리가 더욱 커진다. 성우는 자기부정을 뜻하는 미노(me no)로 바꾸기 전 이름이다. 비석 무덤(버려진 안식처)→ 2층 벽돌집(마음이 통했던 친구집)→ 고시원(사업망한 부모의 일터)을 돌아오는 외출 반경도 서점과 학교 인근으로 확장돼 간다.

박지원은 국가에 희생당한 친구 이희천의 죽음과 정적의 위협을 계기로 또다시 집안에 틀어박힌다. 세수도 하지 않고 손님이 와도 입 한번 벙긋하지 않고 책만 보다 잠들길 반복했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 주지만은 않아. 예나 지금이나 그건 똑같지.” 이야기 선생은 이성계 모독글이 실린 중국책을 읽었다는 죄목으로 죽임 당한 친구의 비명횡사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건 국가의 부도덕성이었으리란 해석을 덧붙인다. 이야기 선생은 박지원이 만난 절망의 끝에서 홀로 고통을 견뎌낸 옛 사람들을 불러온다. 방구석 폐인의 빗장을 움직일 이야기 선생의 선문답. “맞서서 주먹을 주고받지 않는 한 결정적인 한방을 날리지 않는 한 고통은 절대 물러나지 않는 법이더구나.”

권귀순 기자 gskw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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