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 참사 뒤 구조·수습 작업이 진행 중인 삼풍백화점 사고 현장. 명품관이 있던 A동에 각종 매장이 몰려 있어 인명 피해가 더 커졌다. 무너지기 전 이 백화점은 서울 강남에 사는 고소득 중산층 소비자를 위한 ‘생활형 백화점’의 대표 주자 가운데 하나였으며 ‘명품’ ‘호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이종관 당시 대한건축협회 이사 제공
21년 전 6월 순식간 와르르
502명 희생자 낸 삼풍 참사
생존자·유족 등 59명 구술받아
기억 속 진실과 트라우마 채록
‘서울의 아픔’ 기록 프로젝트팀
“무게 조금이나마 나눠지기를”
502명 희생자 낸 삼풍 참사
생존자·유족 등 59명 구술받아
기억 속 진실과 트라우마 채록
‘서울의 아픔’ 기록 프로젝트팀
“무게 조금이나마 나눠지기를”
서울문화재단 기획,
메모리[人]서울프로젝트 기억수집가 지음
동아시아·1만6000원 순식간이었다. “유리로 된 (백화점) 5층 유리창이 맨 처음에는 다닥, 다닥 깨져요. ‘왜 그러지? 저걸 왜 깨지?’ 순간적으로 생각했죠. 다닥, 다닥 깨지더니 갑자기 건물이 쿵 내려앉더라고요. 한순간에 내려앉는 데 3초도 안 걸렸을 거예요.” 길 건너편 주유소 직원은 눈을 의심했다. 백화점 직원들도 징후를 느끼고 있었다. “저희끼리 ‘아니, 가스도 새고 금도 가고 그러면 어, 이 백화점 무너지는 거 아냐?’ 그러면서 농담했어요. 굉장히 웃긴 언니가 (…) ‘야, 이거 흔들면 무너지는 거 아냐?’ 이러면서 포즈도 취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진짜 무너진 거예요, 그날, 진짜로.” 1995년 6월29일 오후 5시55분께, 찰나에 무너져내린 삼풍백화점은 502명의 목숨을 집어삼켰다. 끝내 시신의 한 조각도 찾지 못해 사망 확인이 보류된 실종자가 6명, 크고 작은 부상자가 937명. 1970년 326명의 희생자를 낸 ‘남영호 침몰 사건’을 제치고 한국전쟁 이후 단일 최대 참사로 기록됐지만, 그날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억은 모래를 움켜쥔 손처럼 비어가는 중이다. 속절없는 세월의 풍화작용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1995년 서울, 삼풍>은 이 망각의 법칙을 거스르려는 시도다. 책은 초입부터 참혹했던 21년 전 그날의 사고 현장으로 읽는 이를 데려간다. “건물은 완전히 땅 아래로 사라져버렸고요, (…) 지하로 무너진 판 8개 층 사이사이에 천장재가 조금씩 있는 형태였어요. 떡고물이 있고 떡이 있고, 또 떡고물이 있고 한 것처럼. 안 무너진 B동 쪽을 통해 무너진 A동을 보니 떡시루처럼 돼 있더라고요. 그 잔해 사이에 사람이 살 수 있는 여건이 전혀 없어 보였어요.” “(붕괴된 건물 안은) 말씀드리기도 참혹한, 아고, 마, 말씀드리기도 너무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 일부의 일부만 남아 있는, 그런 몸의 일부만 우리가 볼 수 있었어요. 제가 그 구조현장에서 계속 울고 살았어요.” 이렇게 생생한 기억 제공자를 찾기 위해 이 책을 쓴 기억수집가들은 “맨땅에 헤딩 하듯” 기록을 뒤지고, 백서를 훑고, 전화통에 매달렸다. 동탄, 제천, 멀리는 부산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기억수집가 5명이 2014년 10월부터 꼬박 10개월을 매달렸다. 그렇게 해서 108명을 찾아냈고, 소방관, 경찰관, 서울시 공무원, 의사, 간호사, 검사, 광원, 자원봉사자 등 59명의 이야기를 채록할 수 있었다. “원래는 쇼핑센터로 만든 건물이더라고요.” 지은 지 5년밖에 안 된 건물이 왜 그리도 허망하게 무너졌을까 하는 의문은 검찰 수사에서 풀렸다. ‘쇼핑센터로는 돈 많이 못 번다. 백화점을 해야 한다’는 내부 의견이 나오고 업종이 바뀌었다. “구조가 달라지기 시작한 거죠. 엘리베이터 만들고, 화장실 위치도 바꾸고, 여러 가지 구조를 변경하기 위해 곳곳을 잘라낸 거예요. 그 잘라내는 부분의 구조계산을 (해야만 했는데) 괜찮다, 괜찮다 해가면서 진행한 거죠.” 계획에 없던 식당가가 5층에 들어서면서 건물 하중이 폭증했고, 1층 냉각탑을 옥상으로 옮기면서 ‘동하중’(움직이는 물체가 다른 물체에 가하는 무게)까지 더해졌다. “건물 전체적으로 골병이 들었어요.” 게다가 이 건물은 층과 층 사이를 가로지르는 들보 없이 기둥에 너른 판때기를 그냥 갖다붙이는 ‘무량판’(無梁板) 구조로 지어졌다. 순식간에 폭삭 주저앉은 것은 그 때문이다. 붕괴 당일 점심때 백화점 고위층이 모두 참석한 대책회의가 열렸지만, 영업장 폐쇄는 없었다. 오히려 직원들 입막음 지시가 떨어졌다. 그때 조치를 취했다면 대규모 인명피해는 막을 수도 있었다. “그냥 돈 욕심이 많아 매출을 올리려고 영업을 강행하지 않았나 싶어요.” 이 문제는 나중에 최종 책임자인 이준 삼풍 회장에게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를 적용할 수 있느냐는 ‘고의-과실’ 논란으로 이어졌다. “적용 죄명과 구형은 (검찰 내부에서) 엄청난 토론과 법리 검토를 거쳐, 찬반 거수투표까지 했어요. ‘살인죄는 안 된다’ ‘겨우 7년6월이냐’ ‘더 이상 구형할 수 없다’ ‘국민들, 특히 유가족들이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얘기도 나왔어요.” 4천억원대 자산가였던 이 회장은 사고 뒤 도피했다 체포됐고, 유가족들을 위한 재산 출연도 처음에는 “내가 어떻게 일군 재산인데”라며 거부했다. 그러나 법원에서 유죄를 받아내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검찰은 살인죄 적용을 접었다. 당시 검사였던 이는 기억수집가들에게 물었다. “(결심공판에서) ‘7년6월밖에 구형하지 못하는 것이 정말 가슴 아프다’ 그렇게 말했던 게 참… 법의 미비라고 봐야 할까요?” 건물은 무너질 운명이었지만, 인명피해는 줄일 수도 있었다. “총체적인 문제였죠. 폴리스라인도 설치하지 않고, 현장 진료소도 없고, 컨트롤타워도 없었어요.” 국립의료원, 서울대병원에서 급파된 응급의료 인력은 현장에 왔다 되돌아가야 했다. “구조 지휘체계가 갖춰지는 데 일주일 정도 걸렸다고 보시면 돼요.” 아비규환의 참사 현장에서 살아난 생존자들은 20년 넘게 트라우마와 ‘동거’ 중이다. “제가 아파트 살거든요. 어디서 쿵 소리가 나면 제일 먼저 반응하는 게 저예요. 지하철도 가끔 흔들거리면 불안해서 그 자리에 못 서 있어요.” 혈육을 잃은 유가족의 고통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동생을 잃은 뒤 어머니는) 화병이 생기셔서 몸을 거의 학대하며 사세요. 하루에 거의 18시간을 일하세요. (…) 앰뷸런스 이런 거 보면요, 하, 힘들어요. 제가 그걸 보고 울면 사람들이 쳐다보죠. 불안증이 도지고 경기가 나서 미칠 것 같은데 (…).” 이들은 처음에 기억수집가들을 문전박대했다. 기억을, 회상을 거절했다. 더 이상 삼풍 생존자 누구, 삼풍 유가족 아무개로 불려지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간곡한 설득에, 이윽고 마음을 열었다. “이번 기회에 기억을 좀 해주셨으면 하는, 그저 작은 바람입니다.” 감사의 마음을 표하기도 했다. “잊혀지면 안 될 것 같은데 기록에 남긴다니까 고마운 생각이 들더라고요.” ‘삼풍’은 서울문화재단이 2014~5년에 진행한 ‘서울을 기억하는 방법’ 구술·기록 프로젝트 중 ‘서울의 아픔’을 상징하는 주제로 선정되었다. 마침 작년은 참사 20주기이기도 했다. 기억수집가들이 책 말미에 적은 후기는 겸손하고 소박하다. “살아남은 누군가는 이야기하고, 우리는 들었습니다. 이 기록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짊어진 ‘기억의 무게’가 조금이나마 나누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증언은 그저 회고담에 멈추지 않고, 삼풍 이후 20여년 수치스럽게 반복된 또 다른 참사의 기억들과 그 참사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들에 가닿는다. 날 선 주장과 새된 구호 없이도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삼풍을 몇 줄짜리 건조한 사건일지로 접했을 후세대들에게도 이 책의 소용은 클 것이다. 스무 해 세월을 견뎌낸 기억과 한자 한자 받아적은 기록의 힘이다. 강희철 기자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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