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과 한의 경계 패수는 어디인가?'라는 주제의 상고사 토론회가 21일 오후 동북아역사재단 주최로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언론회관에서 열리고 있다. 김종서 박사(왼쪽)와 박준형 박사가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한나라와 면한) 고조선의 서쪽 국경선 패수(浿水)는 요동의 요수(遼水), 즉 혼하(渾河)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패수는 고조선 당시 요서의 란하(?河) 서쪽에 있었고, 고조선 멸망 후 설치된 낙랑군에선 대릉하(大凌河) 중·하류이거나 소릉하(小凌河)였음에 틀림없다.”
21일 오후 한국언론회관에서 열린 동북아역사재단 주최 ‘제2차 상고사 토론회-패수는 어디인가’에서 발표자로 나선 김종서 박사(한국과 세계의 한국사교육을 바로잡는 사람들의 모임)와 박준형 박사(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는 나름의 연구 결과를 제시하며 팽팽히 맞섰다. 이 문제는 고조선의 강역 추정과 직결돼 있어 ‘강단’ 학계와 이른바 ‘재야’ 연구자들 사이에 중요한 쟁점이 돼왔다.
패수가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이라는 기록은 사마천이 쓴 <사기> ‘조선열전’에 처음 나왔는데, 그 뒤 <한서> 지리지와 <위략> <수경주> 등 관련 사료에서 언급한 위치가 제각각 달라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학설도 란하설(윤내현), 대릉하설(북한), 혼하설(강단 학계 다수), 압록강설(정약용), 청천강설(이병도) 등으로 분분했다.
먼저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로 본 패수의 실제 위치’를 발표한 김종서 박사는 <사기> 조선열전에 나오는 “위만이 무리를 모아 동쪽으로 요새를 나가 패수를 건넜다”는 대목, 기원전 109년 한나라의 고조선 침략 등을 근거로 패수는 요동의 요새에서 동쪽으로 건너는 강인 반면 압록강과 청천강은 북에서 남으로 건너는 강이어서 이 두 강은 패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김 박사는 위만조선의 수도 ‘왕험’에 대한 후한 때 학자 응소, 동진 시대 학자 서광의 주석을 근거로 패수의 위치를 란하로 지목했다. 왕험은 뒤에 요동군 험독현이 됐고, 그 지명이 후에 ‘창려’로 바뀌었는데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할 당시 “패수서군이 방어하던 지점이 패수동군이 방어하던 지점이 되는 곳”은 서쪽의 란하가 맞다고 했다.
반면, 박준형 박사는 ‘고조선 패수의 위치’라는 발표문을 통해 <사기>에 나오는 ‘다시 요동의 고새를 수리하고(復修遼東古塞), 패수에 이르러 경계로 삼았다(至浿水爲界)’는 구절이 후한기 순열이 쓴 <전한기>에선 ‘요수고새’(遼水古塞)로 바뀐 사실에 주목하면서 “<전한기>의 요수, 즉 혼하가 <사기>에 나오는 패수에 해당한다”고 추정했다. 진-한 교체기인 이 무렵 요동을 공격한 고조선은 패수를 사이에 두고 한과 대적하게 됐고, 동호를 격파한 흉노와도 국경을 맞대게 됐다는 설명이다.
박 박사는 고조선 이동설도 제기했다. 애초 요서지방 조양(朝陽)에서 건국했던 고조선은 5세기쯤 요동의 심양으로 옮겼다가 그 뒤 연나라 장군 진개의 공격을 받자 한반도 서북부 평양으로 ‘후퇴’한 것으로 봤다. 그는 고조선이 건국부터 멸망할 때까지 같은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전제하면서 강역 비정 등 여러 학문적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발표 뒤엔 이후석 박사(숭실대)와 심백강 박사(민족문화연구원)의 지정 토론이 이어졌다. 종합토론 사회를 맡은 공석구 한밭대 교수는 “패수의 구체적 위치에 대한 견해는 비록 달랐지만, 두 발표자 모두 한반도 바깥으로 본 점은 오늘 토론회의 의미있는 진전”이라고 평가했다.
강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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