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난 문학평론가는 작가로도 성공할 수 있을까. 저명한 형법 교수에게 범죄 수사를 맡기면 잘해낼까. 같은 논리로, 탁월한 정치학자 또는 사상가가 정치 일선에 뛰어들면 그의 ‘성적표’는 어떨까.
마치 이런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 서병훈 교수(숭실대·정치학)가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왼쪽)과 알렉시스 드 토크빌(1805~1859·오른쪽)이라는 걸출한 학자 출신 두 정치인의 행적을 찬찬히 뜯어보는 논문을 써냈다. 서 교수가 최근 한국정치사상학회 6월 월례발표회에서 공개한 ‘밀과 토크빌: 정계 투신 전후’는 마침 제20대 국회가 출범한 시점이라 더욱 흥미롭게 읽힌다.
지금은 고전의 반열에 오른 저작 <자유론>과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고, 당대에도 이미 드높은 학문적 성취를 공인받은 두 사람이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치 성적표는 낙제점에 가까웠다. 서 교수는 두 사람이 “열심히 노력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고 했다.
한 살 터울이던 두 사람은 서른 이후 학문적으로 깊은 교유 관계에 있으면서 “민주주의와 자유 등 당대를 지배하던 철학적 담론에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문제의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의 궤적은 닮은 듯 달랐다. 밀은 10대 때부터 ‘민주주의 투사’를 동경하며 정치 참여를 꿈꿨지만 나이 쉰아홉이 돼서야 유권자들에게 등 떠밀려 하원에 발을 디뎠다. 반면 이십대 초반부터 ‘수많은 국민에게서 갈채’받는 ‘위대한 정치’를 소망했던 토크빌은 서른두 살에 첫 낙선을 경험하고 이태 뒤 하원에 입성한다.
둘의 지향은 숭고했다. 밀은 정치의 요체를 인간성(humanity) 증진에서 찾고, ‘모든 인민이 참여하는 정부’를 이상으로 삼았다. 위대한 정치가는 “다른 사람더러 앞장서라고 다그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따라오도록 길을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토크빌의 정치는 인간이 영적 성장을 통해 영원한 세계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정치는 특정 계급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런 정치는 의사당 안에서 진지한 토론과 싸움을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밀은 겨우 3년에 그친 ‘현역’ 기간에 ‘진보적 자유주의자’로서 선거개혁, 여성 참정권, 아일랜드, 자메이카 등 남들이 꺼리는 문제들에 집중했다. 어눌한 그는 당시 유행이던 웅변에 취약했고, 권력의지도 박약했다. 재선에 실패한다. “그는 늘 자유당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은 문제만 골라서 논전의 제1선에 섰다. 또 그들과 다른 방향으로 주장을 펼친 경우도 많았다. (…) 극단적이고, 오만하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낙선한 밀은 두 번 다시 정치판을 기웃거리지 않았다. 딸을 데리고 프랑스의 프로방스로 건너간 그는 평생의 취미였던 식물 채집과 독서로 말년을 보냈다.
토크빌의 정치 역정은 밀보다 길고 화려했다. 나폴레옹 쿠데타로 의회가 해산하기까지 12년(1839~1851) 동안 변변한 홍보물 한 번 내지 않고도 선거에서 이기는가 하면, 짧은 기간이지만 외교장관도 지냈다. ‘새로운 자유주의’를 강조하는 한편 1840년 런던조약 이래 프랑스의 위상 하락에 분노한 나머지 ‘전쟁 불사론’을 외쳐 격심한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권력의지는 강했지만 동료 의원들과는 어울리지 않았고, 한 번 연설하면 이틀을 앓아누울 만큼 소질도 체력도 모자랐다. “예민하고 이상주의적인 성격 때문에 고립을 자초했는데, 거의 모든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켰다.”
서 교수의 평가는 냉정하다. 둘 다 정치에 뛰어들고자 하는 당위와 욕구만 앞세웠을 뿐 자신의 정치적 능력이나 소질은 깊이 헤아려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밀과 토크빌은 (…) 글쓰기와 달리 정치세계에서는 제대로 이름값을 못 했”던 “준비 안 된 정치인”이었다. 이론과 실천,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소명의식과 현실정치의 간극을 좁히는 일은 이 두 석학에게도 ‘미션 임파서블’이었던 셈이다. 그래도 세상엔 여차하면 현실정치에 뛰어들려는 정치학자들이 여전히 많다.
서 교수는 학자로서의 이름에 견주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 두 ‘먹물’의 실패사를 갈고 다듬어 연말쯤 책으로 낼 계획이라고 했다.
강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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