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 지음/교음사·8000원 최인호(64·사진) 시인은 한글학회를 거쳐 신문사에서 30년 동안 우리말글을 다듬는 일에 매진하다 2011년 정년퇴임하고 고향인 경남 하동으로 귀향했다. 그로부터 5년 뒤에 낸 그의 세 번째 시집 <바람의 길목에서>에는 고향에서 자연을 벗 삼고 옛사람들 자취를 좇으며 유유자적하는 삶이 오롯하다. “그대 먼길/ 바람 되어 와 닿은/ 이 땅 어디쯤에서/ 돌아보라/ 다시 바람 되어 불어 갈 데/ 짚을 때까지/ 새들도 깃 접는 저녁머리// 먼저 온 바람들/ 머문 자리에서/ 꽃과 나무로 피어 있는 너를 보리라”(‘바람의 길목에서’ 부분) 표제작은 ‘바람의 존재론’이라 할 법하다. 바람에 불려 왔다가 다시 바람에 불려 가기까지 꽃을 피우고 나무 키우는 것이 우리네 삶 아닐지. 자유와 허무의 사이 어디쯤인가를 지나는 허허로운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꽃이라고 다 같은 꽃이 아니고 나무 역시 천차만별이다. 더 예쁜 꽃과 튼실한 나무를 향한 바람마저 부는 바람결에 띄워 보낼 일은 아니다. 초야에 묻혀 산다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모르쇠를 댈 수만은 없는 법. 시인이 새해 덕담 삼아 변혁을 위한 무실역행을 권면하는 까닭이다. “저는 어느 후미진 산기슭에서/ 해를 갈았습니다./ 해갈이를 하고 나니/ 판짜기 판갈이 생각이 납니다./ 선거판 굿판 씨름판 온갖 판 벌이는 해라/ 판짜기 한번 멋지게 하고/ 판갈이 한번 때맞춰 하는/ 한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저마다 계신 곳에서/ 숨지 마시고 나서시어/ 이 땅 이 겨레 길이 살릴/ 판짜기 판갈이를.”(‘새판 짜기’ 부분) 전체 4부로 짜인 시집의 3·4부는 지난 시집에 실린 것들을 비롯해 예전 작품들로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는 “문패 없는 대문마다 먹칠을 하고/ 어둠을 이기어 먹을 간다”(‘어둔 밤 먹자가 되어’)처럼 80년대적 어둠과 반역의 상상력을 내비친 것도 있지만, 시인으로 하여금 마흔몇 해 동안 시를 놓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그리움임을 알게 하는 시 ‘저 아련한 것이’가 유난히 사무친다. “저 아련한 것 무언가/ 들판 끝 물안개/ 안갯속 산울림/ 논틀 뜸북소리/ 하늘 끝 무지개/ 저 아련한 것이/ 떠난 임 옷자락가// 기새꽃 울음 한 점/ 나비 날아앉는 대낮/ 적막 끝 저 아련한 것이”(‘저 아련한 것이’ 전문) 글 최재봉 기자,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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