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거리
말 많은 세상입니다. 날마다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 이에 대한 장삼이사의 비평을 듣고 분간하느라 진이 빠집니다. 역동적인 한국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끔은 산속에 처박힌 채 아무 말도 듣지 않고, 하지 않는 삶을 꿈꿉니다.
26년 전 처음 발간돼 이제는 한국 불교 에세이의 고전으로 자리잡은 <깨달음의 역사> 개정증보판이 이번주 나왔습니다. 조계종 교육원장인 지은이 현응 스님은 깨달음이 ‘모든 번뇌를 끊고 고매한 인격을 이룬 높은 경지’라는 데 이의를 제기합니다. ‘변화와 관계성’의 법칙을 깨닫는 것, 곧 삼라만상이 서로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할 뿐, 산속에서 홀로 고행한다 해서 저절로 깨닫는 건 아니란 이야기지요. 존재에 대한 사랑과 연민, 곧 자비는 역사적 행위의 원동력이라고 지은이는 또한 강조합니다.
그러나 자비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다짜고짜 폭력 드립’ 하는 댓글을 볼 때, 좀 더 친절하고 나긋나긋하게 자신을 납득시켜 보라는 식의 요구를 받을 때 특히 그렇습니다. 자비는커녕, 눈에 불을 켜고 맞받아치며 판을 뒤집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습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이민경 지음, 봄알람)의 뒤표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무지한 말이 난무하는 가운데 나의 마음을 지켜줄 언어가 필요하다.” 적당한 ‘언어’를 찾지 못할 때 삶의 피로도는 극에 달합니다. 특히 비주류의 삶을 사는 이들에겐 더욱 그럴 테죠. 온갖 혐오발언과 언어폭력 속에서 자신을 지켜야 하니까요. 적절하게 입을 열고 닫기 위해 언어를 얻어내는 일, 그것은 어쩌면 깨달음으로 가는 길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유진 책지성팀장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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