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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한바탕 크게 울고, 바닷물에 얼굴을 씻는다

등록 2016-09-01 19:15수정 2016-09-01 19:51

김언수 작가 6년 만의 장편소설
부산을 무대 삼은 건달들의 세계
40대 남자의 외로움과 ‘어른 되기’

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문학동네·1만6500원

건달.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놀거나 게으름을 부리는 사람(표준국어대사전). 그런데 이는 산스크리트어를 옮긴 ‘건달바’에서 기원했다. 음악을 연주하는데 향기만 먹고 사는 신이다.

소설 <뜨거운 피>는 건달 이야기다. 항구도시 부산의 한쪽 구석 작은 해수욕장 ‘구암’(상상의 공간)을 무대로 삼았고, 만리장 호텔의 지배인인 ‘희수’가 주인공이다. 희수는 호텔의 사장이자 구암 암흑가의 두목인 ‘손영감’의 오른팔로서 구암 바닥에선 거칠 게 없다. 그러나 마흔 살로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부하들 몰래 매일 먹고 있다. 지배인 자리 외에는 무엇 하나 제대로 가진 게 없는데 이마저도 위태롭다. 언젠가 등에 칼 맞고 이 바닥에서 사라지고 말 것임을 알고 있다.

소설 <뜨거운 피>의 작가 김언수가 8월31일 오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소설 <뜨거운 피>의 작가 김언수가 8월31일 오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책은 요즘 보기 드물게 600쪽 가까운 두툼한 분량이지만 종착역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간다. 배신과 음모가 넘쳐나고, 마지막에 희수가 칼을 맞을까 독자들도 끝을 향해 함께 달려간다. 미국 영화 <대부> 시리즈(1972·1974·1990)를 비롯해 한국 영화 <신세계>(2013), <내부자들>(2015) 등 수많은 조폭 영화를 봤으니, 이제는 물릴 듯도 한데….

소설의 성취는 건달이라는 소재에 있지 않다. 손영감과 희수를 중심으로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이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또 희수는 두목인 손영감과 항상 티격태격한다. 90도로 인사하면서 ‘형님’ 하고 부르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 동업자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다정한 부자 사이 같다. 여기에 아비 없이 자란 희수에게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따라다니는, 첫사랑 인숙의 아들 ‘아미’도 있다. 노래방 주인 등 구암 해수욕장에서 장사하는 보통 사람들은 건달들이 잡아주는 질서 속에서 아웅다웅 살아간다. <캐비닛>과 <설계자들>에 이어 세 번째 장편을 세상에 내보낸 김언수 작가를 8월의 마지막날 <한겨레> 사옥에서 만나봤다.

먼저 6년 만에 신작을 내놓은 연유를 물었다. “2010년에 <설계자들>을 내놓고 다른 글을 쓰다 2012년에 큰 수술을 받았다. 목뼈 아래로 전신마비가 올 위기였다. 수술을 마치고 인생의 형질이 바뀌었다.”

어쩌다 건달 이야기에 주목했나? “나이 사십이 됐다. 어릴 적 부산에서 자랐다. 동네 할머니가 ‘농약 먹고는 살아도 나이 먹고는 못 산다’고 하시던 말이 생각났다. 내가 자란 동네에서 만난 사람들을 그려보려 했다. 제 소설은 허공에서 땅으로 내려오고 있다. 이번 작품은 드디어 지상에 발톱이 닿았다.”

두터운 분량에 대해 물었다. “우리나라 남성 작가의 경우 보통 20살에 작가수업을 시작해 30대 초반에 단편소설로 등단한다. 20대를 단편만 쓰면서 보내는 셈이다. 등단 뒤 장편을 시작하는데, 단편과 장편은 완전히 장르가 다르다. 나도 그런 과정을 밟으면서 장편을 완전히 새로 배워야 했다.” 김 작가는 이어 자신의 전작인 <설계자들>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더니, <뜨거운 피>에 대해 “내가 처음으로 장편을 완성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이번 작품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무엇보다 40대 건달인 희수가 위태롭게 세상을 헤쳐나가는 모습은 우리네 40대 모두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특히 직장인이라면 살아남기 위해 작품 속 희수처럼 마지막 승부를 봐야 한다. 희수의 불안감과 외로움은 건달만의 것이 아니라, 팍팍한 삶을 사는 우리네 모두의 것일지 모른다. “원래 소설을 지난해 11월 완성했다. 아비 없이 자란 남자의 이야기인 까닭에 ‘찌질한 아버지’로 소설을 풀었다. 그러나 마치고 보니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썼고, 지금의 마무리가 됐다.” 이렇게 소설은 40대 남성의 외로움과 어른 되기를 넉넉히 품어냈다.

책을 읽다 중반부터 ‘과연 누가 죽을까’ 궁금증이 계속 커지지만, 미리 소설의 마지막을 엿보거나 책 끝의 ‘작가의 말’을 찾지 않는 게 좋을 듯하다. 갑자기 긴장이 풀어질지 모른다. “어떤 결론이 되든 마지막에 펑펑 울고 짠 바닷물에 얼굴을 씻는 걸로 마무리하려 했고, 그렇게 했다.” 작가는 어른의 차가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 아이의 정직하고 순수한 세계를 잃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시했다. 그러나 어른 되기 쪽이 주는 어떤 단단함을 더 좋아할 독자도 있을 것이다.

안창현 기자 bl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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