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재발명 -왜 다시 사회주의인가
악셀 호네트 지음, 문성훈 옮김/사월의 책·1만8000원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서유럽 전역에 혁명의 기운이 넘실대던 1848년 <공산당선언>을 발표했다. 이 유명한 문서의 첫 문장은 호기롭다 못해 장엄하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다소 엉뚱하게도 자본주의가 번성한 서유럽이 아니라 전근대와 저발전 사이 어디쯤에 있던 동유럽에서 ‘현신’의 기회를 잡은 공산주의 혹은 그 초급 단계로서 사회주의는 숱한 젊음과 인명을 찬반의 격랑 속으로 몰아넣으며 한때 세계사 무대의 중심을 점했었다. 그러나 채 한 세기가 못 돼 퇴장당하면서, 이제는 몰락한 집안의 싸구려 골동품 취급을 면치 못하고 있다.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유령이 된 것이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사회주의는 근대 사회의 강력한 움직임이었다.” 제3세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중심인물인 악셀 호네트(67·사진) 프랑크푸르트대 교수는 오늘날 사회주의가 별볼일 없는 학설로 전락한 것이 사실이라고 시인한다. “사람들은 사회주의가 다시 대중을 열광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으며, 사회주의가 오늘날 자본주의에 대한 향도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 쓸모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왜 저 지경이 됐을까? 호네트가 <사회주의 재발명>을 쓴 절반의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사회주의는 한참 전에 이미 화석이 돼 버렸다. 그런데도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전개한 “초기 산업주의에 뿌리 박고 있는 사고틀”에 속박된 채 이를 경전처럼 외우고 교리처럼 실행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경제적 생산양식이 사회 전체를 규정한다고 보는 ‘경제결정론’, 자본주의는 자기파괴로 붕괴하고 사회주의가 도래하게 돼 있다는 ‘역사적 유물론’, 노동자 계급이 혁명의 주체라는 ‘프롤레타리아 혁명론’, 시장이 곧 자본주의이므로 시장을 없애야 한다는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론’ 따위다. 호네트는 이 낡은 ‘도그마’들을 가차 없이 휴지통에 버리는 일로 사회주의 재발명의 걸음을 뗀다.
그리고 책의 나머지 절반에서 그는 사회주의 르네상스를 위한 ‘수정 제안’을 내놓고 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와 독립, 그런 개인들의 사회적 연대에 기반을 둔 ‘사회적 자유’, 경제적으로 관리되는 사회(계획경제)라는 낡은 생각을 대체할 ‘민주적 생활양식’의 구현 등으로 요약된다. “수정된 사회주의가 향해야 할 것은 (…) 개인적 자유를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연대의 도움을 통해 이를 번성시킬 수 있는 사회적 생활양식이다.”
호네트가 재발명한 사회주의는 성숙한 인격과 이타적 사고를 지닌, 무척 이상적인 개인들의 공동체 비슷한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앞서 폐기한 전통 교의들에 견주어 추상적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작은 판형에 200쪽이 채 안 되는 분량을 감안하면 완성된 프로그램을 기대하기보다 일종의 ‘발제’로 읽는 편이 좋겠다.
강희철 기자, 사진 사월의책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