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민중항쟁의 원형 ‘10월 항쟁’
현대사·사회운동 연구자 김상숙
국가폭력과 지역 피해자 시선 복원
현대사·사회운동 연구자 김상숙
국가폭력과 지역 피해자 시선 복원
1946년 10월2일 대구 항쟁 당시 발포 현장 사진. 경찰 발포 현장 사진에는 거리 한쪽에 장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엄폐물 뒤에 쪼그려 앉아있고 반대편 피신한 시위 군중 쪽에는 여러 명이 바닥에 쓰러져 있다. 10월2일 대구역 발포로 사망한 피살자 21명은 남성 노동자가 다수를 차지한다. 노동조합원이 아닌 미조직 대중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저자는 분석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 관리청, 돌베개 제공
김상숙 지음/돌베개·1만7000원 그동안 봉인되었던 ‘10월 항쟁’을 다룬 역작(力作)이 나왔다. 이름도 무덤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민중의 피와 땀과 눈물에 관한 생생하면서도 체계적인 종합 보고서다. 오는 1일 70주년을 맞아 항쟁의 주역이면서 가장 많이 희생된 진보운동의 한 세대에게 바치는 글이라고 해야 할까. <10월 항쟁>의 지은이 김상숙은 기록을 바탕으로 대구·경북 지역에서 한국전쟁 전후 학살당한 민간인 수가 1만5000명에 이른다고 추정한다. 이 학살은 직간접적으로 10월 항쟁에 연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46년 9월23일 부산에서 철도파업이 시작된 뒤 전역에서 총파업이 일어났다. 대구에서는 총파업과 시민대회 진압도중 10월1일 노동자가 경찰에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시신 시위’가 벌어지고 삽시간에 노동자총파업이 시민항쟁으로 확대되었다. 청년과 학생들이 앞장을 섰다. 미군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항쟁을 진압했지만 대구뿐 아니라 영천, 선산을 포함한 대부분의 농촌에도 항쟁이 들불처럼 번졌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을 강압적으로 시행한 데 대한 반발이었다. 10월 항쟁은 친일파 처단과 토지개혁, 쌀 배급과 잘못된 공권력 행사 중단을 요구하는 민중의 아우성으로서 나라 전역에서 펼쳐진 시민 항쟁이었다. 1946년 10월부터 12월 중순까지 남한 전역 73개 시군에서 일어나 동학농민항쟁, 3·1항쟁과 함께 이 땅의 3대 민중 항쟁 중 하나로 꼽힌다.
1946년 10월2일 대구 항쟁 당시 발포 현장 사진. 거리에서 장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오가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 관리청, 돌베개 제공
1946년 10월2일 대구 항쟁 당시 발포 현장 사진. 책에는 미국 국립문서기록 관리청이 보관중인 대구 항쟁 피살자 사진과 진실화해위원회가 발굴한 1960년 대구 달서구 본리동 유해 발굴 현장 사진 등 당시 잔혹한 학살현장 사진이 여럿 실렸다. 미국 국립문서기록 관리청, 돌베개 제공
10월 항쟁 진압을 위한 대구와 인근 지역 경찰력 배치 상황을 기록한 1946년 10월4일의 미군 문서. 미국 국립문서기록 관리청, 돌베개 제공
영천경찰서 ‘대공인적위해자조사표’(전 5권, 1979) 중 5-1, 처형자 명부 컴퓨터 입력 자료. 진실화해위원회, ‘경북 영천 국민보도연맹 사건’(2009), 돌베개 제공
임순광 민주노총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위원장, 전 10월항쟁특위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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