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기 신분증명서인 ‘등록표’는 5·16 쿠테다로 들어선 박정희 정권에서 ‘주민등록’으로 법제화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8년 11월21일 자신이 발급받은 제1호 주민등록증을 들어보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안보 명분 전국민 관리·통제가 본질
이정은 교수 ‘사회와 역사’ 가을호 기고 미군정은 등록표에 개인의 성명·연령에다 몸무게와 신장, 신체적 특징과 지문까지 넣도록 하는 한편, 소지자는 검문에 항상 응하도록 했다. 사진이 없던 시절이긴 해도 오늘날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개인 정보를 담도록 한 것이다. 이 등록표는 “한동안 발급되다 없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주민들을 관리·통제한다는 ‘목적’은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한층 강화돼 간다. 49년 10월1일부터 빨치산 토벌지역에선 “반국가사상을 가진 자로부터 양민(良民)을 보호하기 위해” 신원 조회를 거쳐 양민증명서가 발급됐다. 한국전쟁 이후엔 시민증과 도강증, 예방주사증 등의 신분증명이 발급됐는데, 시민증은 “적의 잠입을 방지하고 제5열을 소탕하여 치안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행된 것으로 시민증을 갖고 있지 않은 시민은 ‘적색반동분자’로 통행에 제한을 받는다고 명시돼 있었다. “시민증은 단순히 전시통행증이나 식량 배급의 근거가 아니라 생사를 가르는 것이었다. 시민증 미소지자는 간첩으로 간주되었고, 적과 내통한 자가 되었다. 주민들은 항상 자신의 결백함을 시민증으로 입증해야 했고, 국가의 검문과 검색에 순응하며 죄가 없음을 스스로 밝혀야 했다.” 서울시는 전후인 54년 7월 ‘시민증 발급규칙’을 제정하면서 “남한 내의 반국가 불순분자들을 색출, 제거하고 시민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라고 밝혔다. 시민증을 발급받은 사람은 이를 항상 휴대하고, ‘관헌’이 요구하면 언제라도 제시해야 할 의무가 부과됐다. 60년 5·16군사쿠데타 이후엔 시민증 발급에 경찰이 본격적으로 관여하게 된다. 시민증을 발급받으려면 보증인 2명, 반장·통장·동회장의 도장, 마지막으로 경찰관의 검인이 필요했다. “시민증 교부 과정에서 동회와 경찰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 시민증의 발급 절차는 곧 주민의 사상을 검증하는 과정이었다.” 사상 검증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잃어버리면 ‘3급 이상 공무원’으로 보증인 2명을 세워야 재발급 신청을 할 수 있었다. 요건이 그랬다. 3급 이상 공무원 얼굴 보기도 어려운 장삼이사가 어디서 보증을 받을 수 있었을까. “시민증 재발급 과정에서 어떤 거래와 권력이 난무했을지는 쉽게 상상이 되는 대목이다.” 발급, 재발급으로 끝이 아니었다. 정부는 파출소에서 정기적으로 시민증을 ‘일제 검열’해 검인을 찍어주도록 했다. 경찰 권력은 더욱 크고 비대해졌다. 크고 작은 반발이 없지 않았지만, 간첩 색출에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불심검문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라는 이유로 철저히 무시됐다.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박정희 정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민통제 시스템의 완비를 꾀한다. 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을 계기로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로 존재하던 주민등록 제도를 법제화한 것이다. 이제 국민은 남한 체제를 위협할 ‘적’과 그 반대편의 ‘우리’로 더 명확히 구분되었고, ‘우리’는 주민등록이라는 신원 증명을 통해 정체성을 부여받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힘없는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등록과 관리를 틀어쥔 “국가권력의 회로에 들어가 순응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전국민을 고유번호로 식별하는 주민등록제도는 국가안보와 총력전 태세의 명목으로 강화되면서 (…) 온순한 양민임을 다양한 신분증으로 검증받던 우리나라의 특수한 풍경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60여년인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요컨대 미군정기 ‘등록표’의 디엔에이는 지금도 가로 8.6㎝, 세로 5.4㎝ 크기 플라스틱 카드에 담긴 채 우리 곁에 있다고 이 교수는 결론 맺고 있다. 강희철 기자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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