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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버들치 시인이 차린 ‘아름다운 밥상’ 맛보세요

등록 2016-11-03 20:24수정 2016-11-04 19:34

공지영 ‘지리산 시인’ 박남준 찾아
“미묘하고 순한” 밥먹으며 ‘치유’
신이 난 문장들 읽는 것도 별미
시인의 밥상
공지영 지음/한겨레출판·1만4000원

책 제목 ‘시인의 밥상’은 지리산에 사는 ‘버들치 시인’ 박남준(59)의 밥상을 말한다. 박 시인이 산문집 출판을 마다해 공지영의 문장으로 박남준의 밥상이 공개 겸 출판된 셈이다. 박남준 시인은 1984년 등단해 시집 8권을 냈고 ‘천상병 시문학상’(2011), ‘아름다운 작가상’(2015) 등을 받았다. 공지영은 “그의 삶이 그의 글보다 훨씬 아름답다고 느낀다”고 한 추천사에 썼다. 작품의 아름다움과 작가의 인간적 아름다움, 그 사이에서 많은 이가 아찔해하는 요즘은 미문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쓴 글에 더 허기진다. 시인의 별명인 버들치는 ‘1급수 지표종’ 민물고기다. 공지영의 ‘지리산 오매불망’엔 버들치 시인 비중이 큰 것 같다. 그는 이렇게도 썼다. “돈, 명예, 권력, 허영 들이 똥, 풀, 물고기 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생명은 지친 몸으로 돌아와 월계관을 쓴다. 세상 만물이 제자리에 놓이는 순간 치유가 시작된다.” 박남준을 두고 한 말이다.

지난해 가을부터 올해 여름까지 공지영과 박남준, 그리고 ‘내비도’ 교주 최도사, 가수 진진, 사진작가 숯팁, 거제도 제이(J)는 지리산·거제도·전주·거문도·평창·서울 등 전국을 다니며 밥상을 차린다. 일행은 거문도에서 소설가 한창훈과 합류해 항각구국(엉겅퀴 갈치국)과 해초비빔밥을, 전주에서 콩나물국밥과 굴전을, 거제도에서 볼락 김장김치 보쌈을 먹는 호사를 누린다. 거기에 초록 토마토 장아찌, ‘누구와도 다른 가지선’, 복통도 낫게 하는 갈치조림, 식물성 식감의 낙지, 진달래화전, 생감자셰이크, 유채가 들어간 도다리쑥국 같은, 전국을 쏘다녀도 맛보기 힘든 ‘지리산 명물’ 박남준의 집밥도 받는다. “우리들은 모두 코를 박고 먹었다. 조용했다. 모두! ‘우리 너무 잘 먹고 잘 노는 거 아닌가?’ 우리 중의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자 또 누군가가 대꾸했다. ‘그러면 좋은 거 아니야? 지금 여기서 잘 먹으면 됐지, 감사한 거고.”

박남준 시인이 차려낸 소박하고 순한 밥상.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박남준 시인이 차려낸 소박하고 순한 밥상.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24번의 상차림. 두 작가와 지리산 친구들, 예사롭지 않은 벗들이 예사로 먹고 마시고 한마디씩 하는 게 그렇게 웃기고 뭉클한 건 사투리·은어·속어·독백·방백·지문이 다 동원된 극사실주의적 구어체 문장의 효과다. 직접 기른 식재료로 차린 시인의 밥상에 감탄하는 모습은 마치 모두가 이렇게 외치는 듯. ‘요리는 박남준 아니면 박남준이라거나 박남준이라든지!’

특히 공지영의 아주 신이 난 문장을 읽는 재미가 별미다. 책으로 손맛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밥상마다 실린 사진을 보면 식재료의 색과 질감을 이용하는 솜씨가 상차림이나 인테리어에 참고하고 싶을 정도로 근사하다. 책이란 게, 낱장은 2차원이고 전체는 3차원인 묘한 물건인데, <시인의 밥상>은 종이 한 장의 2차원에서도 지리산 산골 마을, 그의 무밭으로 독자를 가뿐히 초대한다.

박남준 요리의 깊은 맛은 “부드럽고 미묘하고 순하다”. 진하고 단순하고 명쾌한 간으로 요리를 했었다는 공지영은 채식 위주인 시인의 요리를 오래 함께하면서 얻은 기쁨 중 하나가 “다른 생명을 죽이지 않고 그것이 무엇이든 뿌리째 뽑지 않고 덜어내 먹을 수 있다는 고마움”을 알게 된 것이라 한다. 시인의 요리는 그 과정부터가 순했고, 그의 시선 또한 그러했다. 쪼개진 바위 틈에서 싹이 튼 지 600년, 높이 12m, 가지(수관) 17m, 이젠 바위를 감은 구렁이처럼 보이는 소나무를 두고 쓴 박남준의 시. “그 작은 것이 뿌리를 내리다니/ 비가 오면 바위는 조금이라도 더 빗물을 받으려/ 굳은 몸을 안타깝게 이리저리 틀었지/ 사랑이었지…”(‘아름다운 관계’ 일부). 소나무가 바위를 뚫은 게 아니고 늙은 바위가 몸을 뒤틀어가며 어린 나무를 키운 걸 시인은 본 것이다. ‘아름다운 관계’는 이렇게 이어진다. “사람들은 모르지 처음엔 이끼들도 살 수 없었어/ 아무것도 키울 수 없던 불모의 바위였지/ 작은 풀씨들이 날아와 싹을 틔웠지만/ 이내 말라버리고 말았어/ 돌도 늙어야 품안이 너른 법/ 오랜 날이 흘러서야 알게 되었지/ 그래 아름다운 일이란 때로 늙어갈 수 있기 때문이야.”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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