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독서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은영 옮김/한겨레출판·1만3000원 “트레버의 소설이 독자를 낙담시키는 일이란 결코 없다.”(무라카미 하루키) “트레버의 작품이 없었다면 나는 길을 잃었을 것이다.”(줌파 라히리)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작가 윌리엄 트레버(88)가 2009년에 낸 장편소설 <여름의 끝>이 번역돼 나왔다. 맨부커상,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로 꼽히는 이 ‘소설가의 소설가’는 한국 독자에겐 작년에야 처음 소개됐다. 수백 편의 단편과 18권의 장편이 있는데, 한국엔 단편집 두 권이 출간됐고 장편소설은 이번이 처음이다. 가늘게 연주할 때 훨씬 더 아름답게 호소하는 음색. 트레버의 문장은 그렇다. 그는 짜릿하기보단 저릿, 가슴에 쥐가 날 듯한 소설을 쓴다. 인물부터 쓰리다. 실수로 아내와 아이를 죽게 만든 농부 딜러핸, 수녀원에서 고아로 자라다 그 농부네 집의 가정부로 온 뒤 그와 결혼한 엘리, 유부남에게 버림받고 임신중절을 한 뒤 평생 수모 속에 살아온 코널티 양, 고장난 정신으로 마을을 떠도는 노인 오펀 렌 등이 1950년대 아일랜드 작은 마을에 산다. 트레버의 인물들은 대개 상처가 깊다. “절망은 불행의 내용보다 그 자체의 법칙에 좌우된다”는 트레버는 상처의 운동을 침착하게 관찰한다. 어느 여름날, 엘리는 다른 남자와 사랑하게 되고 이 모든 ‘다친 삶’들은 엘리의 마지막 선택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 내용의 파격, 형식의 전복 같은 힘은 플롯 위로 드러나지 않는다. 육중해서 잔잔한 트레버의 시선을 따라가면 보인다. 비가 땅을 두드리듯 무엇이 그렇게 안쪽을 두드렸는지. ‘사랑하고 상처받다 가는 시간’이라고 의미 없는 요약밖에 못하는 삶에 보여준 깊은 공감. 전과 후가 있다면, 전과 후와 그 틈까지 세 장면을 보여주는 섬세한 시선. 트레버 소설의 조밀함이 뭉클한 건 원인과 결과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 “아무 잘못 없는 사람이 겪어서는 안 되는 고통”을 만들지 않기 위함이어서다. 엘리가 그랬듯, 여행가방(소망)에 돌(현실)을 채워 탁한 물속(세월)에 던질지라도.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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