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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이건 설정이 아니라 실정이다

등록 2016-12-08 19:43수정 2016-12-08 20:14

말해봐 나한테 왜 그랬어
김현진·김나리 지음/박하·1만4000원

“골목에서 민정 씨의 가슴을 움켜쥐던 그 미친놈으로부터, 안찰하는 아버지로부터, 그에게 협조하는 어머니로부터, 맞지 않는 열쇠였던 남자들로부터, 온전히 민정 씨 자신으로서 여기까지 온 거 수고 많았어요.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요.”(160쪽)

여기까지, 겨우 왔다. 한국의 20~30대 여성들은 지금 가부장제, 성폭력·성차별 문화와 격렬하게 싸우고 있다. 이 격렬은 과격이 아니라 절박이다. 맹추위에 뛰거나 빨리 걷는 건 무슨 정열 때문이 아니고 그냥 너무 춥기 때문이다. 한국을 살아가는 여성의 솔직한 심정을 에세이와 칼럼으로 써온 김현진 작가가 김나리 작가와 함께 소설 <말해봐 나한테 왜 그랬어>를 냈다. 두 작가 모두에게 첫 소설이다. 생애주기마다 늘어선 성차별의 허들을 절박하게 넘어야 하는 여성의 일상을 얇은 코바늘 ‘섞어 뜨기’ 하듯 촘촘히 썼다.

작가 김현진. 박하 제공
작가 김현진. 박하 제공
소설은 30대 여성 둘이 카카오톡 대화창에서 주고받는 대화 형식이다. 수미는 10년간 사랑해온 남자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다. 남자는 이미 수미가 아는 번호를 버렸다. 현재 그 번호를 쓰고 있는 민정이 수미의 메시지를 읽게 되고, 민정은 답장을 보낸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 주제는 여성의 삶 전반으로 번진다.

“억지로 닫은 서랍 속에서 금방이라도 삐져나오려는 잡동사니처럼 (잔뜩) 구겨 넣어져” 있는 사연들. 언제 성폭력 당할지 모르는 밤중 귀갓길, 성폭력은 밤늦게 돌아다니는 여자에게 하늘이 주시는 벌이라며 딸을 탓하는 아버지라는 남자. “아빠가 나를 때리던 소리. 이 씨발년. 이 개 같은 년 년 년 년 녀언. 다 들었겠지? 내가 씨발년이 된 소리들을 모두”.

하룻밤 섹스가 목적인 숱한 시도와 여자를 “얼굴이 달린 질”로 아는 남자들. “그 망할 놈의 소라넷을 뒤져본 적도 있어요. 혹시 내 얼굴 있을까봐. 그렇지만 난 그들을 뭐라고 하지 못하고 늘 나를 탓했어요.” “그들은 나를 ‘사용’해서 섹스하고 있는 거죠.” “확성기로 소리쳐줘도 몰라요. 꼭 이러죠. ‘그런 남자들은 일부에 불과해’. 그래, 살인범도 인류의 일부에 불과하지.”

이건 설정이 아니다. 실정이다. 있는 그대로. 이 책이 취한 ‘끝없이’ 대화하는 형식은 여성의 현실언어가 흘러갈 길을 줄기차게 내고 있다. 여성의 경험을 축소하거나 부정하는 것, 즉 믿지 못하는 것 자체가 여성에 대한 멸시다. 여성은 거짓말을 잘하거나 사실을 부풀린다는 일방적 전제 때문이다. 남성이 쥔 붓들이 세상을 그려왔다. 그 세상에서 여성의 언어는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평등은 여성의 경험과 언어를 거부반응 없이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한다. 두 작가는 오늘날 여성문제가 어떻게 사회적, 정치적 문제가 되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말에도 힘이 있대요. 언령(言?)이라고, 우리가 나눴던 말들이 지금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요. 그 말들이 언니를 여기까지 불러낸 거예요.”(19쪽)

김나리 작가는 “더 많이 말하고 언제든 호소하라고, 그 목소리 자체가 구원의 재료가 될 거라고,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고 썼다. “슬픔에게 언어를 주자. 말하지 않는 큰 슬픔은 무거운 가슴에게 무너지라고 속삭이니까.”(셰익스피어 <맥베스> 4막 3장)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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