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걸리버란 이름의 인물(영국인)이 1699년 5월부터 1715년 12월까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장거리 대양 항해에 나섰다가 뜻하지 않게 맞닥뜨린 네 편의 기상천외한 나라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맨 처음 도착한 나라는 소인국 ‘릴리푸트’였다. 위키피디아
“나를 운반하려고 그들이 가진 가장 큰 운반기구가 동원됐는데, 높이는 땅에서 8센티미터이고 길이는 2미터, 폭은 1미터20센티 정도 되었으며 바퀴 22개로 움직였다. 그들은 30센티미터 높이의 기둥을 나의 몸 주위로 80개 세우고 붕대를 나의 목, 손, 몸뚱이, 발에 칭칭 감아서는 가장 힘센 사람들 900명 정도가 한꺼번에 붕대를 잡아당겼다. 높이가 12센티미터쯤 되는 말 1500마리가 800미터 정도 떨어진 수도로 나를 끌고 갔다. 그들은 나를 먹이려 수레 20대는 살코기로, 10대는 음료수로 가득 채워 왔고, 보통 크기의 담요 600장을 수레에 싣고 와 담요를 만들어줬다….” 영국 노팅엄셔 출신의 선상의사 걸리버는 항해 도중 거센 폭풍우를 만나 오스트레일리아 남부 해역 인근에서 조난당했다. 배는 어디론가 자꾸 휩쓸려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낯선 땅이었다. 가운뎃손가락보다 약간 큰 15센티미터 남짓한 키의 생물체가 사는 나라 ‘릴리푸트’였다.
1726년 초판 출간 뒤 불티나게 팔려나가
거인국·소인국 등 기상천외한 이야기
영국 사회 조롱하는 사회비판서 성격
<로빈슨 크루소> 반박으로 이해되기도
아일랜드 상류층 형성한 ‘정착자’ 후손
영국 정치무대 실패 맛본 뒤 고향으로
명예혁명 이후 찾아온 ‘금융혁명’의 시대
‘아일랜드 정체성’에 본격 눈뜨는 계기
제2부. 두번째 항해를 떠난 걸리버가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장면은 정반대였다. 희망봉을 돌아 인도 서부 수라트로 향하던 어드벤처호는 수시로 방향이 뒤바뀌는 강한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 동쪽으로 족히 2500킬로미터는 떠밀려 외딴섬에 가닿았다. 식수를 구하러 섬에 오른 걸리버 앞에 높이가 6미터 됨직한 풀숲 너머에서 불쑥 나타난 ‘그’는 키가 교회에 솟아 있는 첨탑만큼 컸고 한 걸음의 폭이 10미터나 되었다. 그곳은 거인들이 모여 사는 나라 ‘브로브딩낙’이었다. “높이 9미터의 식탁에 놓인 지름 5미터짜리 접시에 음식을 담아 먹고 용량이 10리터는 되어 보이는 잔에 물을 마시는 그들은 나처럼 작은 ‘벌레’만 한 것도 인간의 흉내를 낼 수 있으니 인간이란 게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하고 마구 조롱하는 듯했다. 예술의 본고장이고 유럽의 중재자며 세계의 으뜸가는 나라인 나의 조국은 그렇게 무시당했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조너선 스위프트는 영국 국교회 사제가 되기를 희망했으나 꿈이 이뤄지지 않자 아일랜드로 돌아와 영국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걸리버 여행기>를 썼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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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의 합리성을 불신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걸리버란 이름의 인물(영국인)이 1699년 5월부터 1715년 12월까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장거리 대양 항해에 나섰다가 뜻하지 않게 맞닥뜨린 네 편의 기상천외한 나라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소인국(릴리푸트)과 거인국(브로브딩낙)을 차례로 경험한 걸리버는 세번째 항해에선 해적에 붙잡혔다 쫓겨난 뒤 베링해협 남쪽 북태평양을 떠돌다가 지름 72킬로미터 두께 270미터의 ‘날아다니는 섬’(라퓨타)에 도착했다. 고개를 모두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돌리고 있고, 한쪽 눈은 위쪽으로 다른쪽 눈은 속으로 푹 들어간 그곳 사람들은 저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어 대화를 하려면 정신을 차리도록 누군가가 입과 귀를 때려줘야만 했다. 부자들은 ‘때리기꾼’을 고용해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마지막 항해. 알고 보니 해적인 선원들에게 쫓겨나 홀로 버려진 걸리버가 다다른 곳은 거짓말이란 개념조차 모르는 ‘휴이넘’들이 머리와 가슴이 털로 뒤덮인, 타락하고 추한 ‘야후’들을 지배하는 ‘말의 나라’였다. 휴이넘의 매력에 푹 빠진 걸리버는 다시는 지저분한 인간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겠다 마음먹었으나 결국 그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가족들이 기다리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1726년 10월 <멀리 떨어진 여러 나라로의 여행>이라는 제목을 달고 런던에서 출간된 초판은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초판은 한달도 채 안 돼 매진됐다. 기본적으로, 견문록(여행기) 형식의 글에 대한 수요가 탄탄하던 시절이었다.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지명은 모두 지어낸 것일뿐더러, 작품 속에서 걸리버가 표류하던 곳의 지리 정보 역시 현실과 가상이 적당히 뒤섞여 있다. 그럼에도 드넓은 대양의 바닷길을 장악한 영국 입장에서 볼 때, ‘낯선 세상’ 이야기야말로 팽창과 정복의 욕망을 적당히 달래주고 동시에 확대재생산하기도 하는 마약 같은 존재였다.
인간 본성에 대한 조롱과 냉소가 짙게 배어 있는 것도 <걸리버 여행기> 인기에 한몫했다. 17~18세기는 단연 이성과 과학을 중시하는 합리주의의 시대였다. 스위프트의 눈에 비친 합리주의는 성서를 이성적으로 따지려 드는 이신론(理神論)을 넘어 무신론(無神論)으로 쉽게 빠져들 위험을 지닌 요물이었다. 인간 본성의 합리성과 선함을 비웃는 그의 거친 태도에선 군주제와 전통 질서에 충실한 왕당파 가문의 후손이 합리주의 등장 이후 느끼는 불안감의 흔적이 엿보인다. 특히 <걸리버 여행기>는 이보다 7년 앞서 출간된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정면 논박한 작품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걸리버 여행기>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신뢰하고 개인이 사회에 우선한다는 디포의 낙관론적 세계관과는 정반대의 메시지를 담고 있어서다. 그래서였을까? 작품 속에서 세번째 항해에 걸리버를 끌어들여 결국 곤란에 빠뜨린 선장의 이름은, 하필 ‘로빈슨’이다!
1726년 10월 <멀리 떨어진 여러 나라로의 여행>이라는 제목을 달고 런던에서 출간된 초판. 출간 즉시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이듬해인 1727년엔 독일어와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로 발빠르게 번역됐다.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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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국교회 사제 좌절된 뒤 ‘비판 모드’로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걸리버 여행기>의 진면목은 영국 사회를 난도질하듯 비판한 데 있다. 스위프트가 인간 본성을 집요하리만치 조롱한 것도 결국 당대 영국의 정치사회 질서를 정조준한 사회비판 성격의 포석이다. 왜 그랬을까? 잠시 스위프트의 생애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위프트의 할아버지는 영국 국교회 성직자였는데, 청교도혁명 당시 왕당파로 찰스 1세를 지지했다가 박해를 받았다. 아버지대에 영국에서 아일랜드로 터전을 옮겨온 터라 스위프트 본인은 1667년 아일랜드(더블린)에서 태어나고 성장했음에도, 정작 그의 기준은 늘 영국에 맞춰져 있었다. 성인이 돼 영국으로 다시 거처를 옮겨서는 정치권 주변을 기웃거리는 등 출세 야심도 만만치 않았다. 처음엔 ‘휘그파’에 줄을 댔으나 권력을 잡은 ‘토리파’로 말을 갈아타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적 배경을 등에 업고 영국 국교회 사제가 되려던 꿈은 결국 좌절됐다. 더군다나 1714년 앤 여왕이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휘그파가 재집권하자, 스위프트는 영국 생활을 청산하고 아일랜드로 돌아와 둥지를 틀었다.
영국 사회를 조롱하는 <걸리버 여행기>는 스위프트의 좌절감과 실망이 최고조에 이른 바로 이 시절의 작품이다. “영국의 수상 또는 총리라는 야후는 기쁨이나 슬픔, 동정심이나 노여움 같은 감정을 전혀 갖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가 진실을 얘기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반드시 거짓이고, 거짓을 얘기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진실입니다.” 제4부에서 걸리버가 ‘주인’ 휴이넘에게 영국 수상(총리)을 타락하고 추한 야후라고 설명하며 비난하는 대목은 스위프트가 영국 사회에 얼마만큼 적대감을 품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물론 아일랜드의 상황도 반영됐다고 봐야 한다. 1536년 영국 헨리 8세가 아일랜드 정복에 나선 이래 아일랜드는 영국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완전 종속돼 있었다. 영국 국교회 신자가 아니면 공직 진출을 금지하는 ‘처벌법’이 존재했고, 영국이 지정하는 영국 항구를 통해서만 다른 나라로 양모를 수출할 수 있었다. 질 낮은 영국 동전이 유입돼 혼란을 겪기도 했다. ‘날아다니는 섬, 라퓨타’(제3부)는 아일랜드를 지배·착취하는 영국 그 자체였다. <걸리버 여행기>의 뒤를 이은 팸플릿 <겸손한 제안>(1729년)엔 훨씬 거친 표현도 등장한다. “아일랜드에서 수출품은 감자뿐이고 감자도 지금 흉작이니 갓 낳은 아기를 잉글랜드에 수출하는 게 어떻겠냐. 진미를 좋아하는 귀족들에겐 이만한 고기가 없을 텐데….”
그럼에도 스위프트를 곧장 ‘아일랜드의 상징’인 양 단순화하는 건 무리가 있다. 가톨릭에 극단적 거부감을 보였던 스위프트와 가톨릭에 기댄 대다수 아일랜드 주민들 사이엔 애초부터 넘기 힘든 장벽이 존재했다. 당시 아일랜드 주민들은 대체로 세 부류로 나뉘었다. 주민의 대다수인 하층 농민집단(가톨릭), 북부지역의 중간계층(장로교) 그리고 소수 지주계층(영국 국교회). 둘째와 셋째 집단은 주로 영국에서 온 ‘정착자’의 후손들이다. 이 가운데서도 아일랜드의 정치와 경제 모두에서 실권을 장악한 셋째 집단은 전형적인 ‘앵글로-아이리시’(영국계 아일랜드인)로, ‘몸은 아일랜드에, 머리는 영국에’ 둔 사람들이었다. 스위프트의 뿌리는 이 부류에 잇닿아 있었다.
명예혁명으로 권좌에 오른 오렌지공(윌리엄 3세)은 런던의 금융업자(거대상인)들한테서 금 120만파운드를 빌리는 대가로, 정부가 이자만 물고 영원히 원금은 갚지 않는 대신 그들에게 은행(주식회사)을 설립할 권한을 주고 앞으로는 이 은행이 인쇄한 ‘종이’(은행권)만 국가화폐(법정화폐)로 쓰겠다는 칙령을 내렸다. 독점적 발권력을 지닌 영국은행은 1694년 설립됐다. 위키피디아
명예혁명(1688년) 이후 20~30년간은 영국뿐 아니라 아일랜드 역사에도 결정적 국면이었다. 스위프트가 생애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때는 이 시기와 절묘하게 포개진다. 통상 명예혁명이란 의회세력이 주축이 돼 가톨릭 부활을 꿈꾸던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메리 공주와 네덜란드 총독 오렌지공 윌리엄 부부에게 왕위를 ‘평화적으로’ 넘긴 사건을 일컫는다. 흥미로운 건, 혁명이란 단어가 붙은 역사적 사건 가운데 경제가 번창하고 풍요로운 시절에 발생한 경우는 명예혁명을 빼곤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당시 영국은 풍작이 계속됐고 무역흑자는 쌓여갔으며, 특히 신흥 금융기법으로 무장한 돈 많은 신교도들이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잇달아 몰려들었다. 이 와중에 국가채무에 대한 의회의 지급보증(1693년), 발권력을 지닌 영국은행 설립(1694년), 재무성 채권 발행(1696년), 런던 증권거래소 설립(1698년) 등 전례없는 조치들이 잇따랐다. 금융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들이다. 명예혁명의 맨얼굴은 ‘금융혁명’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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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적 발권력 지닌 영국은행의 탄생
<걸리버 여행기> 제2부에서 브로브딩낙 왕은 걸리버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영국의 조세수입이 연간 500만파운드에서 600만파운드 정도 된다고 하고 지출은 그 배가 된다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냐.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영국은 개인과 마찬가지로 파산할 수도 있다는 결론인데. 영국이란 나라의 채권자는 누구이며, 그들에게 갚을 돈은 도대체 어떻게 마련하는가.” 현대사회 국가채무의 본질을 꿰뚫는 이 질문은 금융혁명의 내용을 일깨운다. 명예혁명으로 권좌에 오른 오렌지공(윌리엄 3세)은 프랑스(루이 14세)와의 전쟁비용을 마련하고자 묘안을 짜냈다. 선진금융이 발달한 네덜란드 ‘물을 먹은’ 티가 났다. 돈 많은 런던의 금융업자(거대상인)들한테서 금 120만파운드를 빌리면서 특별한 조건을 제시한 것. 정부가 이자만 물고 영원히 원금은 갚지 않는 대신, 그들에게 은행(주식회사)을 설립할 권한을 주고 앞으로는 이 은행이 인쇄한 ‘종이’(은행권)만 국가화폐(법정화폐)로 쓰겠다는 내용이다. 독점적 발권력을 지닌 민간은행(영국은행)은 이렇게 탄생했다. 국가(정부)가 재정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시장(민간)에 빚을 지는 국채시장도 금융혁명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했다.
아일랜드라고 금융혁명의 도도한 바람이 비켜갈 리는 만무했다. 토지를 손에 쥐고 금융과 상업으로 부를 일군 ‘앵글로-아이리시’ 자산계층을 중심으로 1716년부터 정부를 상대로 한 ‘대출’이 시작됐다. 영국에서 이미 봤던 방식이다. 미래의 조세수입을 담보로 영구히 이자수입을 보장받는 것뿐 아니라 각종 독점적 특혜도 덤으로 따라붙었다. 브로브딩낙 왕이 궁금해했던, 한 나라의 채권자인 이들이야말로 아일랜드의 실질적 지배자로 탈바꿈해갔다. 소수 자산계층 테두리에 묶였던 스위프트는 이런 흐름의 적극적 옹호자였다.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이들 눈엔 아일랜드의 조세정책에 자꾸 개입하려 드는 영국이 ‘훼방자’로 인식되면서, 이들한테서도 ‘아일랜드 정체성’이 움트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몸은 아일랜드에, 머리는 영국에’ 뒀던 과거와 견주면 놀라운 변화다. 그 변화를 이끈 동력은 응당 아일랜드 지배계층의 경제적 이해관계라 할 만하다. 때마침 아일랜드 경제엔 악재가 쌓여갔다. 1740~41년 아일랜드는 비극의 땅이 됐다. 가뭄과 혹한이 번갈아 덮치면서 주식인 감자 농사는 완전 망쳤고 전염병이 온 나라에 창궐했다. 정확한 통계가 남아 있지는 않으나, 연구자들은 대략 1740년 240만명이던 아일랜드 인구의 38%가 사망했다고 추산한다. 사회 전반에 걸쳐 영국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다. 젊은 시절만 해도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으나 아일랜드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떳떳하게 말했던, 인간 본성을 믿지 않으며, 특히 여성을 지독히 혐오한 한 ‘좌절한 야심가’. 세상은 어느새 스위프트를 ‘아일랜드의 애국 작가’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풍자소설의 대가로 한껏 치켜세울 채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