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달콤함은 국경을, 온정은 인종을 넘지 못했다네

등록 2017-05-13 14:15수정 2017-05-13 14:50

[토요판] 최우성의 동화경제사 ⑩ <찰리와 초콜릿 공장>

노르웨이 이주자 가정 출신 로알드 달
소년시절 초콜릿 추억 되살려낸 작품
황금빛 초대장 발견하는 행운 얻어
‘웡카의 공장’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집단해고 등 노사관계 현실 떠올려
인종적 색채 드러낸 표현 ‘수정’
초콜릿 산업 떠받친 아프리카 노동력
‘아동노예’ 논란도 끊이지 않아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1964년 초판 출간 이래 두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다. 초판에 있던 “갈색 곱슬머리를 지닌 아프리카 피그미족”이란 표현은 이후 인종적 색채를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방향으로 수정됐다. 사진은 2005년 팀 버턴 감독의 영화 속 한 장면. 위키피디아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1964년 초판 출간 이래 두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다. 초판에 있던 “갈색 곱슬머리를 지닌 아프리카 피그미족”이란 표현은 이후 인종적 색채를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방향으로 수정됐다. 사진은 2005년 팀 버턴 감독의 영화 속 한 장면. 위키피디아

찰리가 사는 곳은 대도시 변두리의 허름한 판잣집이었다. 방 두 개짜리 집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엄마와 아빠 등 일곱 식구가 함께 살았다. 아침으로는 빵 한 조각, 저녁엔 양배추수프가 일곱 식구가 하루에 먹는 음식의 전부였다. 굶주린 찰리를 놀리기라도 하듯 등굣길 가게 진열대엔 언제나 탐스러운 초콜릿이 가득 찼다. 어느 날, 찰리네 가족은 아빠가 퇴근길에 들고 온 저녁 신문을 펼쳐보다 깜짝 놀랐다. 신문 한 면엔 ‘웡카의 공장, 드디어 소수의 행운아들에게 전격 공개 예정’이라는 큼지막한 문구가 쓰여 있었다. 웡카의 공장은 찰리네 동네에 자리 잡은,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크고 유명한 초콜릿 공장이다. 웡카의 초콜릿 제품에서 황금빛 초대장을 발견하는 어린이 5명만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공장 견학을 마친 뒤엔 평생 먹을 초콜릿을 선물로 준다고 했다.

전 세계적으로 초대장 찾기 광풍이 불었다. 첫 번째 행운의 주인공이 등장한 건 신문 기사가 나온 다음날. “먹는 게 취미”라는 아우구스투스 글룹이라는 남자아이였다. 소란도 끊이지 않았다. 두 번째 초대장을 찾았다고 주장한 아이는 가짜임이 드러났고, 한 괴짜 과학자는 포장지를 뜯지 않고도 그 안에 황금빛 초대장이 들어 있는지 아닌지를 즉석에서 가려내는 기계를 발명했다고 자랑했다. 자동 무쇠팔이 금속성분이 감지되면 팔을 뻗어 초콜릿을 잡아채는 방식인데, 어느 백화점에선 공개 시연을 진행하던 중 무쇠팔이 공작부인의 금니를 빼버리기도 했다. 다시 며칠 뒤, 버루카 솔트라는 이름의 두 번째 행운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엄청난 부자인 버루카의 아버지가 초콜릿 50만개를 구입해 자신의 공장 여공들에게 포장지를 벗기도록 시켰다는 사연이 신문 지면을 도배했다. 하루 종일 껌만 씹는 바이올렛 뷰리가드, 텔레비전 앞에 붙어 사는 마이크 티비…. 이제 마지막 한 장만 남았다.

노르웨이 이주자 가정에서 태어난 로알드 달은 전투기 조종사로 2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다. 부상을 당한 뒤 작가의 길에 들어선 달은 소년 시절 초콜릿에 얽힌 추억을 되살려 1964년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발표했다. 위키피디아
노르웨이 이주자 가정에서 태어난 로알드 달은 전투기 조종사로 2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다. 부상을 당한 뒤 작가의 길에 들어선 달은 소년 시절 초콜릿에 얽힌 추억을 되살려 1964년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발표했다. 위키피디아

비밀의 열쇠, ‘움파룸파’ 사람들

그날은 배고픔에 지친 찰리가 눈발을 헤치며 고개를 푹 숙이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우연히도 은빛 나는 물건이 바닥에서 눈에 띄었다. 50펜스짜리 은화였다. 한참을 망설이던 어린 찰리의 머릿속엔 오직 초콜릿 생각 하나뿐. 곧장 근처 가게로 달려간 찰리는 웡카의 초콜릿을 사서 포장지를 뜯었다. 찢긴 포장지 틈을 비집고 황금빛이 슬그머니 배어나왔다….

1964년에 출간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영국에 정착한 노르웨이 이주자 가정에서 태어난 로알드 달이 쓴 아동소설이다. 그의 부모는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노르웨이 극지탐험가 로알 아문센의 이름을 따 아들에게 로알드(Roald)란 이름을 붙였다. 198㎝의 거구인 달은 2차 세계대전에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한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하지만 전투 중 큰 부상을 당한 뒤 작가로 전업했고, 기발한 발상으로 동심을 되살리는 작품을 쏟아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뒷이야기도 흥미롭다. 달이 13살 때 유명한 초콜릿 기업 캐드베리가 그가 다니던 학교에 초콜릿 신제품을 단체선물로 보냈는데, 그 맛에 너무 감동한 나머지 나중에 커서 꼭 초콜릿 공장에서 일하겠다고 다짐했단다. 달콤한 냄새가 진동하는 초콜릿 공장을 일터로 삼겠다던 13살 소년의 꿈이 30여 년 뒤 11살 찰리의 행운으로 실현됐다고 해야 할까.

찰리가 할아버지 손을 잡고 웡카의 공장 문을 들어선 날. 초콜릿의 마술사라 불리던 창업자 윌리 웡카가 5명의 어린이 일행을 맞이했다. 공장 내부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심장부 격인 ‘초콜릿방’에 들어서니 아름다운 계곡이 한눈에 들어왔다. 계곡 양쪽으로 초콜릿 초원이 펼쳐졌고, 계곡 사이로 ‘갈색의 강’이 흘러 폭포를 이뤘다. 바로 그때,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저게 뭐죠? 움직여요. 어머, 난쟁이들이네요.” 어린이들이 잔뜩 놀란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웡카는 웃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움파룸파 사람들이야.”

세계 1·2위 카카오 생산국인 코트디부아르와 가나에선 여전히 불법 ‘아동노예’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서구 초콜릿 기업들의 불공정한 거래 관행도 카카오 생산 과정의 어두운 실태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세계 1·2위 카카오 생산국인 코트디부아르와 가나에선 여전히 불법 ‘아동노예’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서구 초콜릿 기업들의 불공정한 거래 관행도 카카오 생산 과정의 어두운 실태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움파룸파’. 꼭꼭 감춰졌던 웡카의 공장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순수한 동심을 그려낸 것만 같던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 냉혹한 현실세계가 살짝 얼굴을 내비치는 순간이기도 했다. 언젠가 할아버지는 찰리에게 웡카의 공장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예전에 웡카씨네 공장엔 수천명이나 되는 일꾼들이 있었단다. 그런데 어느 날 웡카씨는 갑자기 일꾼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지. 공장 문을 닫고는 사슬로 잠가버렸어. (…) 몇 달 뒤, 놀랍게도 공장 굴뚝에서 하얀 연기 기둥이 다시 피어올랐어. 아무도 들어간 사람이 없는데….” 웡카의 공장에선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실마리는 “자신들을 다시 일꾼으로 받아주리라 기대하고 몰려간 사람들이 잔뜩 실망하고 돌아섰다”는 문장에서 엿볼 수 있다. 익숙한 풍경이다.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에선 집단 해고와 공장 폐쇄, 대체 인력 투입으로 이어지는 기업의 구조조정 전략이, 그리고 일자리를 둘러싼 백인 노동자와 ‘이방인’의 갈등이 어른거린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 세상에 나온 건, 인도와 카리브해 지역 영연방국가 출신들에게까지 영국 시민권이 확대돼 노동시장의 긴장감이 잔뜩 높아진 뒤다.

공장 노동자에 대한 묘사도 시대 상황을 반영하듯 변모했다. 애초 초판에선 새 일꾼들이 “갈색 곱슬머리를 지닌 아프리카 피그미족”으로 명시돼 있었다. 인종적 색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표현이다. 이 때문에 멜 스튜어트 감독이 원작을 토대로 영화 작업을 진행할 때 아프리카계 배우들과 제작진 사이에 공개적인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결국 원작자인 달 자신이 시나리오 작업에 공동 참여해 1971년 개봉한 영화는 일꾼들을 ‘오렌지색 피부와 갈색 머리의 키 작은 사람들’로 살짝 바꾸었다. 이어 달은 1973년 개정판(소설)을 내면서 아예 움파룸파라는 가상의 나라 사람들로 거듭 손질했다. 키가 작고 갈색 피부를 지녔다는 묘사에서 아프리카계임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1960~70년대 인권운동의 영향이 반영된 결과로 짐작된다.

영국 버밍엄 교외 ‘본빌’에 있는 초콜릿 테마파크 ‘캐드베리월드’. ‘웡카의 공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진풍경이 펼쳐져 있다. 위키피디아
영국 버밍엄 교외 ‘본빌’에 있는 초콜릿 테마파크 ‘캐드베리월드’. ‘웡카의 공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진풍경이 펼쳐져 있다. 위키피디아
돌이켜보면, 초콜릿의 역사는 달콤함과는 거리가 먼 탐욕과 눈물로 얼룩져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카카오 열매의 과육 속에서 원두를 꺼내 원두의 지방질 건더기를 물과 녹말에 섞은 음식을 즐긴 것으로 전해진다. 마야제국 사람들은 카카오 열매를 화폐로 사용하기도 했고, 아스테카 문명에선 카카오가 전사들이 먹는 대표적 전투식량이었다. 아스테카 문명을 정복한 코르테스는 스페인 왕 카를 5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항과 전투력을 키워주는 신의 음료이고, 한 남자가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걸을 수 있게 해준다”고 썼을 정도다. 이후 카카오는 몇 세기에 걸쳐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갔다. 유럽 대도시의 시민계층이 모여 이성과 인권을 찬양하는 자리의 탁자 위엔, 아프리카 노예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수확한 카카오가 으레 빠지지 않았다.

퀘이커교 기업의 ‘온정적 자본주의’

카카오를 원료로 만든 고형 초콜릿이 산업으로 자리 잡은 건 19세기 들어서다. 네덜란드의 판하우턴이란 기술자가 카카오의 원두에서 기름덩어리를 깔끔하게 분리하는 수압식 압착기를 발명한데다, 초콜릿이 도시 노동자들이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영양섭취원으로 떠오른 사정도 작용했다. 이 무렵, 영국에서 유독 퀘이커교 전통의 기업들이 초콜릿 산업을 이끈 사실은 무척 이채롭다. 브리스틀의 의사 조지프 프라이가 일군 ‘프라이’는 판형 초콜릿을 처음 선보였고, 버밍엄에서 캐드베리 형제가 창업한 ‘캐드베리’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독점적으로 초콜릿을 납품했다. 특히 마케팅에 능했던 캐드베리는 초콜릿을 상자에 담아 ‘사랑의 징표’라고 선전하는 등 초콜릿의 현대적 이미지를 일찌감치 확립한 장본인이다.

원래 퀘이커 교도는 교단이 설립된 17세기 이래 영국 사회가 누리던 기본권을 대부분 박탈당했다. 사회 개혁에 대한 강한 열망을 키운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그 영향은 훗날 그린피스, 국제앰네스티, 옥스팜 등의 사회운동단체를 싹트게 했다. 기업 운영에서도 이런 특징이 잘 드러났다. 캐드베리의 경우, 19세기 중반에 이미 노동자평의회를 둬 종업원들의 권리 증진에 힘썼고, 1878년엔 버밍엄 교외에 복지시설을 갖춘 공동체 마을 ‘본빌’을 세웠다. 현대적 의미의 ‘기업 복지’ 원형이다. 요크에서 퀘이커교 집안이 창업한 또 다른 초콜릿 기업 ‘라운트리’는 공장 안에 도서관을 짓고 무료 교육·의료 서비스를 제공했을뿐더러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주5일 근무제를 시행했다. 로버트 오언 등 여러 계몽공장주가 활동했다고는 해도, 퀘이커교 초콜릿 기업의 ‘온정적 자본주의’는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퀘이커교 전통의 초콜릿 기업 캐드베리는 19세기 중반에 이미 노동자평의회를 둬 종업원들의 권리 증진에 힘썼고, 1878년엔 버밍엄 교외에 복지시설을 갖춘 공동체 마을 ‘본빌’을 세웠다. 위키피디아
퀘이커교 전통의 초콜릿 기업 캐드베리는 19세기 중반에 이미 노동자평의회를 둬 종업원들의 권리 증진에 힘썼고, 1878년엔 버밍엄 교외에 복지시설을 갖춘 공동체 마을 ‘본빌’을 세웠다. 위키피디아
하지만 장막 뒤엔 또 다른 현실이 가려져 있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초콜릿 기업이 원료로 사들인 카카오는 어디서, 어떻게 생산됐을까? 19세기 들어 카리브해 지역 일대의 카카오나무는 과잉생산 탓에 서서히 말라 죽어갔다. 서구 기업들은 아프리카 적도 남북 20㎞ 안에 있는 습한 기후지역을 대체 생산지로 찾아냈다. 카리브해 지역에서 아프리카로 카카오나무가 대량 ‘공수’된 건 이때부터다. 아프리카 중서부 기니 해안의 포르투갈령 섬나라 상투메 프린시페가 대표적인 초기 카카오나무 ‘이주지’다.

카카오 열매를 수확하는 노동조건은 극도로 열악했다. 앙골라 등 주변 나라에서 온 노동력이 주로 투입됐는데, 이들은 겉으론 ‘계약에 따른 고용관계’로 포장했으나 사실상 노예나 마찬가지였다. 악명 높은 ‘쿨리 제도’의 판박이다. 쿨리란 ‘고용계약서를 쓴 하인’쯤으로 번역될 텐데, 실상은 노예의 다른 이름에 불과했다. 실제로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로디지아(짐바브웨의 옛이름)의 광산을 소유한 영국 기업들은 노예노동에 대한 비난을 피하면서도 인건비 부담을 최소화하고자 중국과 인도 등에서 쿨리를 대거 들여왔다. 가슴에 숫자 문신을 강제로 새긴 채 남아프리카 트란스발 금광에 투입된 이들 중국인 노동자는 결코 자유인이 아니었다. 분명한 건 당시 영국 정부뿐 아니라 캐드베리 등 주요 초콜릿 기업들 모두가 카카오 생산 과정의 끔찍한 실태를 알고도 눈감았다는 사실. 노동자를 가족처럼 살뜰히 여긴 ‘착한 기업’들일지언정, 온정은 국경과 인종의 벽을 넘지 못했다.

웡카의 공장 옮겨놓은 캐드베리월드

뿔쌩쌩이, 쿵쿵왕왕이, 왕알알이 같은 맹수가 우글거리는 밀림에 살았다는 움파룸파 사람들. 카카오 열매를 실컷 먹으며 사는 게 평생 꿈인 그들은 정작 자신들이 손도끼로 껍질을 까고 발라낸 카카오 열매가 어디에 쓰이는지 알지 못했다. 오늘날 세계 1·2위 카카오 생산국인 코트디부아르와 가나의 어린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게다가 ‘카카오 벨트’라 불리는 아프리카 중서부 지역에선 오늘날에도 ‘아동노예’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리크루터’와 운반책 등 교묘하게 역할을 나눈 인신매매단이 말리와 부르키나파소 등지에서 아이들을 꾀어 코트디부아르와 가나의 카카오 농장에 불법으로 넘긴다는 게 의혹의 뼈대다. 사실로 드러난 사례도 허다하다. 다만, 아동노동의 참혹한 실태 고발만큼이나, 초콜릿 산업의 전체 공급망 사슬을 투명하게 만드는 일도 과제다. 영국에서 밀크초콜릿이 1파운드에 팔릴 때, 유럽의 생산업자는 43펜스를 챙기지만 아프리카의 카카오 공급자는 고작 7펜스를 손에 쥔다. 서구 초콜릿 기업의 원료 가격 후려치기가 계속되는 한, 불법 ‘아동노예’의 유혹은 뿌리 뽑기 힘들다.

“얘야, 난 이 공장을 너에게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단다.” 끝대목에서 가난한 찰리는 뜻밖에도 웡카의 공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받는다. 심술궂고 버릇없는 다른 아이들이 갖가지 곤욕을 치르며 벌을 받은 것과 대비된다. 가난하더라도 착한 마음씨를 잃지 말라는 교훈과 달콤한 초콜릿은 꽤 잘 어울리는 조합인 듯 보인다. 버밍엄 인근 본빌엔 캐드베리가 세운 테마파크 ‘캐드베리월드’가 있다. 윌리 웡카의 공장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한 진풍경이 펼쳐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초콜릿의 달콤함과 찰리의 행운에 듬뿍 취해 돌아간다. 하지만 <찰리와 초콜릿 공장> 전체를 통틀어, “10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공장을 돌렸다”는 움파룸파 사람들의 ‘목소리’는 왜 단 한차례도 등장하지 않을까? 그저 공장주(웡카)가 그들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줄 뿐. 움파룸파. 몽환적인 이름 속에 가려지고 숨겨질지언정, 세상은 사랑과 온정 ‘바깥’ 사람들에 의해 굴러가는지도 모른다. 달콤한 초콜릿 이야기이기에 더욱 씁쓸한 교훈 아닐는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1.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시그널’ 10년 만에 돌아온다…내년 시즌2 방송 2.

‘시그널’ 10년 만에 돌아온다…내년 시즌2 방송

괴물이 되어서야 묻는다, 지금 내 모습을 사랑해 줄 수는 없냐고 3.

괴물이 되어서야 묻는다, 지금 내 모습을 사랑해 줄 수는 없냐고

스승 잘 만난 제자, 제자 덕 보는 스승…손민수·임윤찬 7월 한무대 4.

스승 잘 만난 제자, 제자 덕 보는 스승…손민수·임윤찬 7월 한무대

민주주의 ‘덕질’하는 청년 여성, 이토록 다정한 저항 [.txt] 5.

민주주의 ‘덕질’하는 청년 여성, 이토록 다정한 저항 [.txt]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