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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톨스토이 읽어 내던 한국 여공들의 글쓰기에 매혹”

등록 2017-07-06 19:05수정 2017-07-07 18:20

노동문학·민중문학 아닌 ‘여공문학’
지은이 루스 배러클러프 인터뷰

“89년 대학 때 여성노동자 첫 만남
신경숙 ‘외딴방’, 죄의식 건드려”
여공문학-섹슈얼리티, 폭력 그리고 재현의 문제
루스 배러클러프 지음, 김원·노지승 옮김/후마니타스·1만7000원

1989년 뜨거운 8월, 18살의 오스트레일리아(호주)에서 온 대학생이 김포공항에 내렸을 때 그를 맞으러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목사인 부모의 뜻에 따라 호주국립대에 입학하자마자 학생 기독교 단체(ASCM)에 가입했다. 어느 날 이 단체로부터 한 제안을 받았다. 이 단체와 연계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의 초청으로 3주간 한국을 여행할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다른 호주 학생들은 모두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가길 원했고 남한에 가길 원하는 사람이 없어 신입생인 그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하지만 공항엔 아무도 마중 나와 있지 않았다. 임수경이 평양으로 간 뒤 관련자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안기부를 피해 연맹 소속 학생들이 모두 잠적했기 때문이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기억을 더듬어 “종로 와이엠시에이(YMCA) 호텔로 가주세요”라고 말했다. 와이엠시에이 사람들을 거쳐 며칠간의 수소문 끝에 초청한 대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학생들은 서울의 대학가, 전라도의 농촌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중에서 경기도 부천에서 만난 여공들이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부분 자신과 비슷한 나이 또래였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다 건강을 해친 이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여공들은 “언젠간 글을 쓰고 싶다”며 러시아어를 독학해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막심 고리키의 책을 원서로 읽고 있었다. 5일 오후 서울대학교에서 <여공문학>의 옮긴이 노지승 인천대 교수(국어국문학과)와 함께 만난 지은이 루스 배러클러프는 이 만남을 떠올리며 “중산층 가정에서 한국에서 만든 신발을 신어왔던 나는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서로를 알고 싶은 강한 끌림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호주국립대에서 여전히 한국 문화와 젠더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여공문학>의 저자 루스 배러클러프(호주국립대, 한국문화·젠더 연구)는 “89년 여공들을 만났을 때 중산층 가정에서 한국에서 만든 신발을 신어왔던 나는 죄책감이 드는 동시에 한국의 여성노동자들을 알고 싶은 강한 끌림을 느꼈다”고 말했다.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여공문학>의 저자 루스 배러클러프(호주국립대, 한국문화·젠더 연구)는 “89년 여공들을 만났을 때 중산층 가정에서 한국에서 만든 신발을 신어왔던 나는 죄책감이 드는 동시에 한국의 여성노동자들을 알고 싶은 강한 끌림을 느꼈다”고 말했다.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첫 방문에서 9년이 흐른 1998년, 한국의 노동사를 연구하기 위해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6개월간 공부하면서 그는 전국공공노조연맹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연구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에게 노조원들이 여공의 수기들을 추천해줬다. 장남수의 <빼앗긴 일터>, 석정남의 <공장의 불빛>, 송효순의 <서울로 가는 길>이었다. 그 책을 가지고 호주로 돌아가 사전을 끼고 한자씩 읽어내려 갔다. 그렇게 시작된 여공들의 수기에 대한 연구는 2012년 <여공문학> 출간으로 열매를 맺었다.

이 책에서 배러클러프는 한국 ‘여공문학’의 계보를 그린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출간된 강경애의 장편소설 <인간문제>(1934), 1980년대 장남수·석정남 등의 수기(모두 절판), 1995년 신경숙 장편소설 <외딴방>을 각 시대의 대표적인 여공문학으로 꼽았다. 장남수·석정남 등의 수기를 두고 배러클러프는 “산업화 시기 한국에서 여공들은 자신들을 정숙한 여성으로도, 진정한 노동자로도 바라보지 않는 젠더와 계급 이데올로기에 자신들이 포획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고, 자신들을 더욱 온전히 재현하기 위해 노동조합 활동과 글쓰기에 몰입했다”고 풀이했다.

그는 특히 강경애의 <인간문제>를 높이 평가했다. 이 책이 나온 식민지 시기 1920~30년대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가 주도한 ‘프로문학' 작품의 상당수는 노동자계급 여주인공을, 자본가계급에게 성적인 박해를 받는 희생양이자 남성 노동계급이 구원해야 할 대상으로 그렸다. 하지만 프로문학 중에서도 여공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 강경애의 <인간문제>는 “사고하고 행동하는 정치적 존재로서 노동자계급 여성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밝힌다. 그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도 “강경애의 작품은 여공들이 처한 성적인 폭력으로 가득한 상황을 숨기지 않으면서, 이 상황에서 피해자나 공모자가 된 여공들이 어떻게 대응하고, 사랑하고, 성취하는지를 다뤘다는 점에서 중요하다”며 다시금 찬사를 보냈다.

신경숙의 <외딴방>을 두고는 “한국 노동 문학 최후의 걸작”이라고 했다. 이후 중간계급에 속한 전문직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로 대체돼, 여공문학의 맥이 끊겼다는 것이다. <외딴방>은 여성노동자가 노동운동에 참여해 주체로 발돋움하는 방식의 기존 여공문학 문법과는 거리를 둔다. 사실 이 책이 출간 당시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1990년대의 죄의식을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그는 평가했다. “자신은 기회의 세계에 편승해 살아남았다는 사실”과 “여공의 죽음과 우리가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집단적 공모 의식”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신 작가의 표절 논란을 두고 “<외딴방>은 표절 작품이 아니었고, 내 연구의 관심은 작가가 아닌 작품이 재현한 여공의 목소리”라고 선을 그었다.

명맥이 끊긴 여공문학을 지금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를 묻자 배러클러프는 “산업화는 1990년대에 끝나지 않았다. 계급은 사회를 분열시켰고 노동계약은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 여공들에게 가해진 성적인 폭력은 여전히 다른 모습으로 한국을 포함한 모든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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