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언의 시동詩動걸기
김이강 ‘극장 앞에서’
<문학과사회> 2017년 여름호 낮에 해야 할 일들이 있는 까닭에 나는 주로 밤을 새워 글을 쓴다. 새벽에 깨어 있는 이가 어디 나뿐이겠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오늘 따라 유난히 잠투정이 심한 아가를 달래느라 이웃이 현관문을 오가는 소리가 열린 창문 사이로 들렸다. 이웃은 당황해하는 것 같았다. 쉽게 잠들지 못하고 보채는 아가를 등에 업고, 급하게 신고 나왔으리라 짐작되는 슬리퍼를 끌며 집 주위를 몇 바퀴나 돌았다. 나는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그이의 기척을 느끼면서, 채 말이 되지 않은 감정의 결들이 날것 그대로 아가의 울음에는 있구나 싶은 생각이 새삼 들어 이웃이 귀가할 때까지 몇십분을 잠자코 있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혹시라도 집 안의 누군가가 잠을 설칠까 봐 조마조마해서 집 밖으로 나왔는데 막상 나왔더니 잠든 동네를 깨우는 건 아닌가 싶어 더더욱 노심초사했을 이웃의 마음을 상상했다. 가로등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도로를 새로 짓거나 목욕탕 청소를 하는 이들, 편의점을 지키거나 택시를 운전하는 이들, 거리에서 농성을 하는 이들이 지키는 이 밤 곳곳마다 가로등의 빛은 위안이 될 거였다. 그러니 늦은 밤이라 하더라도 잦아들 줄 모르는 저 빛은 달리 말해 이 도시가 버티는 방식일지도 몰랐다.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하게 지나가버리는 어떤 시간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명료하게 감당해야 하는 시간으로 있는 세상에, 우리는 산다. “옛날식 극장 간판을 올려다본다/ 극장 앞 풀밭에서/ 줄을 선 사람들이 따뜻한 오후 해를 받고 있다// 옛날식 극장 간판을 올려다보는데/ 얼굴 위로 자꾸만 무엇인가 떨어진다/ 고개를 숙이면 뒤통수 위로/ 손을 올려 가리면 손등 위로// 오후 해를 받던 사람들이/ 하나 둘 그늘로 피해 간다// 담요와 양산/ 은박지에 말린 김밥이나 라디오를/ 풀밭 위에 남겨두고 사라진다// 나뭇잎들이 그늘로 고개를 들이민다/ 극장에선 영화 상영이 지연된다는 소식을 알리고// 오늘 이 영화를/ 기다릴 것인가 말 것인가/ 저마다 손등이나 뒷머리를/ 만지작거린다”(김이강, ‘극장 앞에서’ 전문) 옛날식 간판이 있는 극장 앞에서 오후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매일의 낮 시간을 회사나 학교에 갇혀 지내는 이들과는 다른 일정을 가진 이들일 것이다. 이들의 얼굴 위로 무언가가 떨어지는데,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만큼은 시인은 함구한다. 그 대신 누군가는 맞이할 수도 없고 맞이할 생각도 못할 오후의 햇볕이 시대와 어긋난 감각의 사물들에 먼저 스며드는 장면을 비춘다. 거기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잠자코 머뭇거릴 수 있는 시간이 그늘의 형태로 담겨 있는 것도 같다. 얼핏 단정하게만 보이는 이 시가 사무치는 이유는 왜인가. 누군가에게는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가버린 어떤 ‘때’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변화의 기미가 주어지는 때, 그러나 그러거나 말거나 이도 저도 못한 채 그저 감당하기만 해야 하는 때일 수 있을 텐데, 어쩌면 그와 같이 기어이 비밀을 만들면서 계속되는 이 세상을 시인이 잠자코 쳐다보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삶의 입체는 벌써부터 있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문학과사회> 2017년 여름호 낮에 해야 할 일들이 있는 까닭에 나는 주로 밤을 새워 글을 쓴다. 새벽에 깨어 있는 이가 어디 나뿐이겠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오늘 따라 유난히 잠투정이 심한 아가를 달래느라 이웃이 현관문을 오가는 소리가 열린 창문 사이로 들렸다. 이웃은 당황해하는 것 같았다. 쉽게 잠들지 못하고 보채는 아가를 등에 업고, 급하게 신고 나왔으리라 짐작되는 슬리퍼를 끌며 집 주위를 몇 바퀴나 돌았다. 나는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그이의 기척을 느끼면서, 채 말이 되지 않은 감정의 결들이 날것 그대로 아가의 울음에는 있구나 싶은 생각이 새삼 들어 이웃이 귀가할 때까지 몇십분을 잠자코 있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혹시라도 집 안의 누군가가 잠을 설칠까 봐 조마조마해서 집 밖으로 나왔는데 막상 나왔더니 잠든 동네를 깨우는 건 아닌가 싶어 더더욱 노심초사했을 이웃의 마음을 상상했다. 가로등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도로를 새로 짓거나 목욕탕 청소를 하는 이들, 편의점을 지키거나 택시를 운전하는 이들, 거리에서 농성을 하는 이들이 지키는 이 밤 곳곳마다 가로등의 빛은 위안이 될 거였다. 그러니 늦은 밤이라 하더라도 잦아들 줄 모르는 저 빛은 달리 말해 이 도시가 버티는 방식일지도 몰랐다.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하게 지나가버리는 어떤 시간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명료하게 감당해야 하는 시간으로 있는 세상에, 우리는 산다. “옛날식 극장 간판을 올려다본다/ 극장 앞 풀밭에서/ 줄을 선 사람들이 따뜻한 오후 해를 받고 있다// 옛날식 극장 간판을 올려다보는데/ 얼굴 위로 자꾸만 무엇인가 떨어진다/ 고개를 숙이면 뒤통수 위로/ 손을 올려 가리면 손등 위로// 오후 해를 받던 사람들이/ 하나 둘 그늘로 피해 간다// 담요와 양산/ 은박지에 말린 김밥이나 라디오를/ 풀밭 위에 남겨두고 사라진다// 나뭇잎들이 그늘로 고개를 들이민다/ 극장에선 영화 상영이 지연된다는 소식을 알리고// 오늘 이 영화를/ 기다릴 것인가 말 것인가/ 저마다 손등이나 뒷머리를/ 만지작거린다”(김이강, ‘극장 앞에서’ 전문) 옛날식 간판이 있는 극장 앞에서 오후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매일의 낮 시간을 회사나 학교에 갇혀 지내는 이들과는 다른 일정을 가진 이들일 것이다. 이들의 얼굴 위로 무언가가 떨어지는데,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만큼은 시인은 함구한다. 그 대신 누군가는 맞이할 수도 없고 맞이할 생각도 못할 오후의 햇볕이 시대와 어긋난 감각의 사물들에 먼저 스며드는 장면을 비춘다. 거기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잠자코 머뭇거릴 수 있는 시간이 그늘의 형태로 담겨 있는 것도 같다. 얼핏 단정하게만 보이는 이 시가 사무치는 이유는 왜인가. 누군가에게는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가버린 어떤 ‘때’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변화의 기미가 주어지는 때, 그러나 그러거나 말거나 이도 저도 못한 채 그저 감당하기만 해야 하는 때일 수 있을 텐데, 어쩌면 그와 같이 기어이 비밀을 만들면서 계속되는 이 세상을 시인이 잠자코 쳐다보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삶의 입체는 벌써부터 있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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