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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만 시간을 쓴 사람

등록 2017-08-17 18:58수정 2017-08-17 19:19

정혜윤의 세벽세시 책읽기

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프레데릭 파작 지음, 김병욱 옮김/미래인(2017)

나는 지금 오직 사랑하는 친구들을 위해서만 시간을 쓸 줄 알았던 한 사람을 생각한다.

7월 하순의 어느날 나는 세월호 유족과 팥빙수를 먹고 있었다. 그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고 통화 중에 유족은 언성을 높였다. “뭐라고? 그걸 말을 안 했다고? 그걸 몰랐다고?” 통화가 끝나자 나는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박종필 감독 알아요?” 나는 박 감독의 이름만 알고 있었다. 고 김관홍 잠수사의 영상물을 만들었고 목포 신항에서 세월호를 촬영중인 독립영화감독이었다. “박 감독이 7월초에 좀 피곤하다고 잠시 쉬겠다고 해서 그렇게만 알고 있었더니 간암 말기고 한달 시한부라고 해요. 그런데 유족들에게는 절대로 알리지 말라고 해서 우리도 지금 알게 된 거예요.” 나는 나도 모르게 달력을 봤다. 한달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로부터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타는 듯이 더운 날 그의 부음을 들었다. 퇴근하고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서울대병원 영안실에 갔다. 장례식장 가는 길에 달이 떠 있고 달 아래 플래카드들이 걸려 있었다. ‘박종필 감독님, 당신과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416연대’ ‘가난한 이들의 소중한 친구, 박종필 감독님의 영면을 빕니다. 장애인 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 광화문 공동행동’. 슬프지만 강한 사람들이 그의 죽음 아래 모여들었다. 노숙자, 얼굴이 여윈 사람들, 장애인, 산 채로 죽을 뻔했던 사람들. 세월호 유족의 친구였던 박종필 감독은 7년간 간경화를 앓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발병 소식을 듣고 황급히 달려간 세월호 유족들에게 그가 한 말은 “미안하다”였다. 뭐가 미안한 걸까? “더 같이 있어야 하는데…” 그리고 황망한 얼굴의 유족들에게 강조했다. ‘나는 원래 아픈 거라고, 나는 원래 병이 있던 거라고, 세월호를 찍느라 무리해서 아픈 게 아니라고.’

나는 그의 추모 영상물을 보고 그가 제작한 독립영화들을 보고 있다. 그가 힘겹게 숨결을 모아 뱉은 마지막 말. “형, 우리는 뭐 하는 사람이야? 뭐 하는 사람이지? ― 형, 우리는 감동을 줘야 하는 사람이야.”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사라지려는 그의 가슴은 아직도 주고 싶은 사랑으로 얼마나 가득차 있던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얼마나 각성되어 있던가.

그의 유언은 프레데릭 파작의 <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의 한 부분을 생각나게 했다.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속 글이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일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면 내 몸이 아직 몇 년 정도, 대충 6년에서 10년은 더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몸을 아낀다거나 마음의 동요와 이런저런 어려움을 피해갈 생각은 없다. 좀 더 오래 사는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명심하고 있는 것, 그것은 수년 내에 과업 하나를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30년이나 떠돌았기 때문에 내겐 갚아야 할 부채와 완수해야 할 과업이 있으며 세상이 내게 관심을 갖는 건 내가 감사의 표시로 추억거리를 남기는 한에서인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살아가야 할 것 같다. 변함없이, 덧없이. 바로 이런 사람들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면서. 이런 사람들의 삶에 깊이 영향 받으면서. 사랑의 증거들을 남기면서.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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