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독서
손석춘 지음/시대의창·1만5000원 “짐작했겠지만 이 기록은 울음이다. 무릇 심방(무당)은 단계를 거친다. 단계마다 굿을 열흘 해야 다음 단계로 올라간다. 지금까지 적어온 한 문장, 한 문장은 나의 울음이자 서툰 굿이다.” 나이 아흔을 넘긴 한 여인이 신명을 받아 자신의 삶을 읊조린다. 이 글은 그대로 한 맺힌 영혼들의 ‘영개울림’(씻김굿)이 된다. 일제강점기 제주도에서 심방의 딸로 태어나 교사를 꿈꿨던 주인공 고은하는 대구사범학교에서 강인혁과 만나 조선 해방과 사회주의 세상을 꿈꾼다. 지리산에서 함께 항일운동을 하며 해방을 맞고 결혼도 하지만, 그들의 삶은 4·3항쟁, 여순항쟁, 한국전쟁과 분단을 차례로 겪으며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은하 혹은 미리내였던 주인공도 어느덧 아키코란 이름으로 살아가게 된다. 하나의 이름으로는 살 수 없었던 한 여인의 삶은 질곡어린 한국 현대사와 고스란히 맞물린다. 소설은 친일 경찰 박병도가 서북청년단이 되고 재벌로 살아남는 모습을 통해 ‘친일파 청산’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여전히 반목하는 이데올로기에 지배당하는 우리의 현실을 꼬집는다. 끈질기게 살아남아 사람을 괴롭히는 그를 단죄하는 은하의 모습은 “어쭙잖은 화해나 양비론”을 거론하는 사람들에게 역사적 진실을 직시하라고 일갈한다. 2017년 이태준문학상을 수상한 손석춘 작가의 여섯번째 장편 소설. 지은이는 박헌영, 김일성, 박정희 등 실존 인물을 작품에 포함시켜 주인공의 굴곡진 삶이 허구인지 사실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제주 항쟁 보고서들을 책상 위에 두고 원고를 썼다”는 주인공의 독백은, 언론인 출신인 지은이의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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