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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호퍼의 그림에 단 문학적 주석

등록 2017-09-14 19:19수정 2017-09-15 11:32

빛 혹은 그림자
로런스 블록 엮음, 이진 옮김/문학동네·1만8000원

한 손으로 잔을 잡고 있으면서 다른 손에 낀 장갑은 벗지 않는 여자. 혼자 그러고 있는 여자의 손을 오래 쳐다본 적이 있다.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1882~1967)의 그림 ‘자동판매기 식당’(1927)에서. 양손 가득 온기가 필요해 나머지 한 쪽의 장갑을 벗지 않는 여자를 보면, 그 여자를 둘러싸고 있는 차가운 공기가 보였다. 냉기라면 잠시라도 참기 싫을 만큼 마음이 서늘할 때면 이 그림이 생각나곤 했다. 생각이 난다는 건 눈앞에 있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상태다. 그렇게 ‘눈을 감고도 볼 수 있는’ 무엇엔 눈으로는 다 감지되지 않는 영감이 서려 있다. 걸작들이 공유하는 특징이다.

<빛 혹은 그림자>는 호퍼의 그림 17점에서 영감을 받아 쓰인 단편소설 모음집. 공동저자 17명은 ‘장르문학 어벤저스’다.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스티븐 킹과 조이스 캐럴 오츠, 호퍼의 최고 권위자로 알려지는 게일 레빈을 포함해 마이클 코널리, 리 차일드, 크리스 넬스콧, 로런스 블록 등 영미권의 쟁쟁한 스릴러·미스터리 작가들이 오직 호퍼의 이름으로 모였다. 이 책의 기획자이기도 한 로런스 블록이 호퍼의 ‘자동판매기 식당’에 이야기를 입힌 ‘자동판매기 식당의 가을’은 올해 에드거상 최고 단편 부문을 수상했다.

에드워드 호퍼, ‘자동판매기 식당’, 1927년. ⓒ Des Moines Art Center/문학동네 제공&#8203;
에드워드 호퍼, ‘자동판매기 식당’, 1927년. ⓒ Des Moines Art Center/문학동네 제공​

20세기 미국 풍경과 미국인의 삶을 고독감과 상실감을 위주로 표현한 호퍼의 애호가 중엔 글을 짓거나 읽기 좋아하는 이가 적지 않다. 사연이 있을 것 같은 분위기의 인물들, 리얼리즘 작가로 분류되지만 현실을 아주 사실적으로 반영하지도 않고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도 않는 독특한 표현력 때문일 것이다. 아일랜드 출신 미술평론가이자 호퍼의 오랜 친구였던 브라이언 오도허티는 “호퍼의 작품은 관찰자와 관찰되는 인물 모두에게 언어적 주석을 촉구”한다고 했다.

호퍼는 무엇보다 빛의 화가다. “그림자도 빛을 발한다”는 그의 말처럼 17가지 이야기는 삶의 응달에도 날카롭게 흐르는 윤기 혹은 냉소를 잡아챈다. 핸드백에 개인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다니다가 도둑으로 몰리는 ‘자동판매기 식당’의 저 여자는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친 모습으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능력”을 노래한 시를 떠올리면서도 궁금해한다.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과연 그런 능력을 갖기 원할지”.

호퍼의 그림은 석상처럼 차갑고, 움직이지 않고서도 빛과 그림자가 새겨지는 대로 모습이 달라지는 신비한 조각 같다. 이 책을 보니 서로 다른 상상과 문체가 새겨질 때도 그렇다. 소설마다 첫 장에 컬러 도판으로 그림이 실렸다.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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