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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언의 시동詩動 걸기] ‘당연히’가 아닌 방식으로

등록 2017-09-21 19:26수정 2017-09-21 19:56

이원, ‘봄 셔츠’, <사랑은 탄생하라>(문학과지성사, 2017)

36번째 ‘304낭독회’(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억하기 위한 낭독회)에서 쉽게 잊히지 못할 얘기를 들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아픔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때 벌어질 수 있는 사나운 상황에 대한 얘기였는데, ‘당연한 아픔은 없다’는 사실이 진한 인상을 남겼다. 아픔을 겪는 일이란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낯선 통증이 마음에 새겨지는 과정이다. 그러니 아픔의 수신자에게, 일상에서 비켜난 감각을 삶의 일부로 체화해야만 하는 그 순간순간은 당연한 것이라기보다는 새삼스러운 것에 가깝다. 우리가 마음의 움직임에 관해 말할 때 ‘당연히’라는 부사를 쓰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매번 마음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상황은 ‘당연한 것’으로 설명될 수 없는 과정을 거친다. 이원의 시를 읽으며 나는 앞서의 얘기를, 상대가 겪는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방식을 통과할 때야 서로가 서로를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할 수 있다는 얘기로 듣는다. 상대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를 ‘당연히’가 아닌 방식으로 살피는 일. 이는 곧 그 마음의 주인을 구체적으로 실감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당신의 봄 셔츠를 구하고 싶습니다/ 사랑을 만져본 팔이 들어갈 곳이 두 군데/ 맹목이 나타날 곳이 한 군데 뚫려 있어야 하고/ 색은 푸르고/ 일정하지 않은 바느질 자국이 그대로 보이면 했습니다// 봄 셔츠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차돌을 닮은 첫번째 단추와/ 새알을 닮은 두번째 단추와/ 위장을 모르는 세번째 단추와/ 전력(全力)만 아는 네번째 단추와/ 잘 돌아왔다는 인사의 다섯 번째 단추가// 눈동자처럼 끼워지는 셔츠// 들어갈 구멍이 보이지 않아도/ 사명감으로 달린 여섯 번째 단추가/ 심장과 겹쳐지는 곳에 주머니가/ 숨어서 빛나고 있는/ 셔츠를 입고// 사라진 새들의 흔적인 하늘/ 아래에서/ 셔츠 밖으로 나온/ 당신의 손은 무엇을 할 수 있나요// 목에서 얼굴이 뻗어 나가며,/ 보라는 것입니다// 굳지 않은 피로 만든 단추. 우리의 셔츠 안쪽에 달려 있는”(이원, ‘봄 셔츠’ 전문)

셔츠에 매달린 단추에는 그것을 만지작거렸을 셔츠 주인의 순간이 깃들어 있고, 셔츠에 나 있는 구멍으로는 셔츠 주인의 몸이 움직이기를 시작할 준비를 할 때마다 품었을 마음이 배어 있다. 그래서인지 시에서 “봄 셔츠”는 글자 그대로의 옷만을 지칭하진 않는 것 같다. 셔츠의 구멍으로 팔과 목이 드러나고 셔츠의 단추가 잠기는 사이에, 셔츠 주인이 살면서 겪었을 환희와 절망의 순간들이 한데 묶여 하나의 매무새를 갖추어나가고 이윽고 ‘사람’의 모양새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봄 셔츠”는 어쩌면 한 계절 그 셔츠를 입은 사람이 어엿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품었던 마음의 또 다른 한 형태가 아니었을까.

한 사람을 “굳지 않은 피”가 도는 ‘사람’으로 대하는 일은 그 사람이 애쓰며 통과해온 마음의 움직임을 존중하는 가운데 가능하다. 덧붙여 이 시를 읽으며 나는 문득, 많은 이의 마음이 어떤지 아랑곳하지 않고 전선과 공격을 논하는 몇몇에게 ‘그런’ 방식은 당연하지 않다고, “셔츠 밖으로 나온” “당신의 손”은 사람을 살피고 있느냐고 묻고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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