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한겨레>와 만난 미국 스탠퍼드대 빈곤·불평등센터의 총책임자인 데이비드 그러스키. 그는 빅데이터로 불평등을 연구하는 등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근거기반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실리콘밸리, 정보기술 혁명, 스타트업 등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신경제’의 중심지다. 정보기술의 발전이 가져오는 변화가 워낙 깊고 커서, 이곳에 있는 ‘신경제’의 주역들은 “불평등을 확산시킨다”는 혹독한 비판을 받아왔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비판은 캘리포니아에서 새로운 움직임을 태동하게 만들었다. 빅데이터 등 앞선 정보기술을 활용해 빈곤과 불평등의 실태를 더욱 면밀하게 파악하고, 이를 완화시키는 정책을 마련하겠다는 움직임이다.
15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한 카페에서 만난 데이비드 그러스키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사회학)는 “지금 캘리포니아는 역사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순간을 지나고 있다. 그 중심에는 ‘근거기반정책’(Evidence Based Policy)이 있다”고 말했다. 불평등 연구의 대가인 그는 스탠퍼드 빈곤·불평등센터(Stanford Center on Poverty & Inequality·이하 센터)의 총책임자로 일하고 있으며, 최근 연세대 사회학과 BK21플러스 ‘사회적 연대와 공존’ 사업단과 불평등연구회의 초청으로 방한했다. 스탠퍼드대는 구글·휼렛패커드 같은 거대기업으로 커가기도 하는 수많은 ‘스타트업’들의 요람 구실을 하는 등 실리콘밸리의 중추다. 이곳에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빈곤·불평등 연구기관이 있으며, 정부·민간과 다양한 협업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다.
미국 스탠퍼드대 산하 스탠퍼드 빈곤·불평등센터 누리집. 센터는 빈곤과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연구활동과 지역 사회와의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 누리집 갈무리.
그러스키 교수는 “대공황 이후 각종 사회 제도들의 확충에 힘입어 한동안 줄어들었던 불평등은 1970년대 말부터 급격히 커지고 있는 추세”라며, “현재 미국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런 현실에 맞서, “최근 가용하게 된 다양한 데이터를 활용해 빈곤·불평등 현실을 ‘모니터’하고, 각종 정책과 프로그램들을 ‘평가’하며, 평가를 넘어 가장 효율적인 프로그램을 예측해 ‘만들어내는’ 것”이 센터의 주된 업무라고 소개했다. 가장 큰 특징은 ‘빅데이터’ 등 정보기술 역량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그는 올해 4월 과학저널인 <사이언스>에도 실린, ‘절대적인 소득 이동성’(absolute income mobility) 연구 내용을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들었다.
“1940년대에 태어난 세대와 그 부모 세대, 그리고 1980년대 태어난 세대와 그 부모 세대를 대상으로 삼아, 30살이 된 자식 세대가 부모 세대의 소득을 넘어섰는지 여부를 살펴봤습니다. 결과를 보면, 40년대생의 경우 92%가 부모의 소득 수준을 넘어섰지만, 80년대생의 경우엔 단지 50%만이 부모의 소득 수준을 넘어섰죠.”
누적된 불평등으로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이 실종된 현실을 보여주는 연구인 셈이다. 정부가 저소득층 노동자 가구를 부조해주는 ‘근로장려세제’(EITC)의 실효성을 따져본 연구도 또다른 사례다. 다양한 데이터를 연결해 살펴보니, 근로장려세제의 혜택을 받은 가구들에서 자녀들의 건강 상태가 굉장히 좋아졌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 정책이 “원래 의도한 효과뿐 아니라, 세대를 넘어서는 효과까지 내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스키 교수는 “과거에는 이런 연구가 불가능했다”고 짚었다. 핵심은 납세 현황 등 정부가 틀어쥐고 있는 각종 행정자료들이다. “이전까지 연구자들은 굉장히 한정된 데이터만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10~15년 동안 행정자료에 대한 접근 가능성이 조금씩 커졌고, 이제서야 인구조사 등 다양한 다른 자료들과 연결시켜 현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예전에는 평면적인 소득 조사만 가능했다면, 이젠 출신 지역이나 인종 분류를 적용하는 등 더욱 강력한 분석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빅데이터로 불평등 연구하는 데이비드 그러스키 스탠퍼드대 교수가 15일 오전 종로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그는 “실리콘밸리가 주도한 기술 변혁이 빈곤·불평등 확산과 같은 부정적인 ‘외부성’을 낳는다는 비판이 거셌고, 실리콘밸리 사람들도 이에 동의하고 있다. 때문에 현재 어떻게 하면 기술을 빈곤·불평등을 최소화하는 데에 효과적으로 쓸 수 있을지가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고 말했다. 실제로 캘리포니아에서는 최저임금을 대폭 올리고 기본소득 도입 실험을 하는 등 눈에 띄는 ‘혁신’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대학-정부-민간의 협업이 있다고 했다. ‘와이 컴비네이터’란 민간 기업의 주도로 오클랜드시에서 무작위로 100가구에 월 1000~2000달러를 기본소득으로 지급하는 실험이 대표적인 사례다. 센터는 이 실험에서 참여자들의 동의를 얻어 그들의 행정자료를 확보하고, 지급된 기본소득이 실제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세부적으로 따져보는 일을 수행한다.
무엇보다 그러스키 교수는 “정책이 정치보다 앞선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정치에 의해 정책이 결정되곤 했는데, 이제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측정된 근거들에 기반해 정책을 최대한 공정하게 평가한 뒤 정치로 하여금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재 캘리포니아에서 힘을 얻고 있는 ‘근거기반정책’의 지향점이라 했다. 80년 전 루스벨트 정부는 공황을 이겨내기 위한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사람들에게 대규모 주택 융자를 지원했다. 그러나 이른바 ‘유색 인종’들은 이런 정책 대상에서 배제됐다. 이 차이는 그 후로 오랫동안 유색 인종들이 백인들의 소득과 부를 결코 따라잡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적인 불평등의 불씨가 됐다. 이 사례를 언급하며 그러스키 교수는 “그때와 달리 지금의 우리는 현실을 더욱 깊게 파악할 수 있는 도구들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정치가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가용한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모든 정보들을 탁자 위에 올려놓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어떤 정책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르는 ‘어둠’ 속에서 민주주의는 죽어간다”고 덧붙였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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