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석 지음/시대의창·1만8500원 생명체의 세포 안에서만 존재 증명을 할 수 있는 바이러스는 종종 숙주보다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아 개체와 집단의 운명을 시험해왔다. 갑상선암 전문의가 쓴 <판데믹 히스토리>는 최초 인류의 진화에서부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사자(약 1000만명) 수보다 몇 곱절이나 많은 2500만~50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에 이르기까지 ‘질병이 바꾼 인류 문명의 역사’를 장구한 연대기로 조망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사의 주요 장면마다 ‘크게 유행한(판데믹·pandemic)’ 바이러스성 감염병이 어떻게 집단의 운명을 바꿔놓았는지가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펼쳐진다. 먼 옛날, 일군의 유인원 무리가 아프리카 열대우림의 나무 위에서 초원으로 내려온 것은 인류 진화의 첫 단계에서 결정적 사건이었다. 급격한 기후변화와 지각변동으로 고온다습한 숲이 줄어든 반면, 건조하고 햇빛이 강한 초원지대가 늘어났다. 초기 인류에게 중대한 도전이었지만, 세균과 기생충에도 달갑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인류 진화 과정 가운데 가장 혁명적인 장면을 바로 질병이 연출했다.” 중남미의 잉카 문명과 아스테카 문명이 16세기 유럽의 침략자들에게 한순간 멸망한 최대 원인은 총포가 아니라 천연두였다. 스페인의 정복자 코르테스가 아스테카 제국에 발을 들여놓은 지 2년 만에 인구의 4분의 1이 사망했다. 잉카제국에선 천연두에 더해 홍역이 선진적인 도로망을 따라 신속하게 퍼져나가면서, 많게는 전체 인구의 90%가 절멸했다. 그즈음 유럽에선 성병인 매독이 군인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 들불처럼 번졌다. 본디 유럽에 없던 매독균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묻혀왔다는 게 정설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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