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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화폐이론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등록 2018-01-04 19:41수정 2018-01-04 19:49

2008년 금융위기 후 ‘현대화폐이론’ 부상
“정부 지출이 세입 넘어도 된다” 주장
“무한정 통화 발행하는 정부, 파산 안해”
비트코인엔 “바보들 속이는 도구”

균형재정론은 틀렸다-화폐의 비밀과 현대화폐이론
L. 랜덜 레이 지음, 홍기빈 옮김/책담·3만원

2008년에 본격화된 세계 금융위기는 인류사에서 보기 드문 경제 재앙이었다. 1930년대 대공황에 비견되는 초유의 경제 위기는 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간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었던 경제 이론이나 관념이 실제로는 부실한 토대 위에 구축된 모래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우기도 했다.

‘불평등’ 문제가 그런 부류 중 하나다. 불평등은 위기 전에는 모두가 추구해야 할 ‘미덕’은 아닐지라도 우리 삶을 좀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불쏘시개 내지 필요악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불평등이 생산성 향상의 원천인 ‘경쟁’을 낳는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위기 이후 우리는 불평등은 외려 정치·경제 위기를 불러오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선 불평등 해소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금융화’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위기 전에는 첨단 금융기법이 동원된 금융화가 상품 가격의 변동성을 줄이고 자원을 좀더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데 기여한다고 봤으나, 오늘날에는 이런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들은 드물다. 금융화의 한 단면인 파생금융상품을 가리켜 ‘월가의 현인’ 워런 버핏은 ‘대량살상무기’(WMD)에 빗대지 않았던가. 2000년대 금융 거물들을 사로잡았던, “모든 가격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며 거품 존재 자체를 부정한 ‘효율적 시장 가설’도 금융위기를 거치며 더 이상 위세를 떨치지 못하는, 혹은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는’ 관념으로 추락했다.

현대화폐이론은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후보였던 버니 샌더스(왼쪽)와 제러미 코빈 영국 노동당 대표(오른쪽) 등 스타 진보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경제 정책으로 채택하면서 일약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AP 연합뉴스
현대화폐이론은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후보였던 버니 샌더스(왼쪽)와 제러미 코빈 영국 노동당 대표(오른쪽) 등 스타 진보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경제 정책으로 채택하면서 일약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AP 연합뉴스

이런 격동의 기간 동안 삐죽이 모습을 드러낸 대안 이론 중 하나가 엠엠티(MMT, Modern Money Theory·현대화폐이론)다. 멀게는 18세기 영국 경제학자 제임스 스튜어트, 가깝게는 20세기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조지프 슘페터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이 이론은, 단 한 번도 현실 정치나 주류 담론 시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해 갑자기 주요 선진국의 대권에 도전한 정치인의 경제 사상으로 채택이 되면서 일약 주목을 받았다. 버니 샌더스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후보와 제러미 코빈 영국 노동당 대표 등 스타 진보 정치인들이 엠엠티에 열광한 이유는 뭘까.

<균형재정론은 틀렸다>는 엠엠티가 진보 정치인들을 끌어당긴 이유를 비교적 쉽고 자세하게 풀어놓는다. 전통적으로 진보 정치인들은 큰 정부, 과감한 정부지출, 공공 서비스 확대를 강조해왔다. 그러나 이런 구상은 번번이 ‘정부 부채나 재정 적자를 늘려 국가 경제를 불안케 한다’거나 ‘시장에 과도한 통화를 공급해 물가 급등을 초래한다’는 반박에 힘을 얻지 못했다. 엠엠티는 이런 반박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짚으며, 오히려 균형재정론이 때로는 국가 경제를 망가뜨리고 가장 어려운 계층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엠엠티 이론이 깨부수는 주류 담론의 핵심 명제는 ‘정부 지출은 세수를 넘어설 수 없다’이다. 주류 경제학자나 정부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진리’로 널리 퍼져 있다. 정부도 수입(세수)을 넘어서 돈을 쓰게(지출) 되면, 가계나 기업 등 민간 부문과 마찬가지로 파산한다고 사람들은 믿으며, ‘피 같은 세금’을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민단체와 언론은 정부가 세금을 낭비하지 않는지에 관심을 쏟는다.

엠엠티는 이렇게 말한다. “법정 통화가 존재하고 통화를 무한정 발행할 수 있는 정부는 파산하지 않는다. 외려 정부의 지출 축소는 민간 부문의 적자(또는 부채)를 키울 뿐이다.” “세수로 충당되지 않는 지출 재원은 정부가 돈을 찍거나 국채를 발행하면 될 일이다.” “세수(혹은 세금 낭비) 걱정이 우선이 아니라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완전고용)을 하도록 하는 게 먼저이다.”

물론 엠엠티가 정부에 무한정 돈을 쓰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과도한 물가상승을 초래하지 않는 선에서, 또 민간 부문에서 잘할 수 있는 영역은 지출을 피하라는 언급도 한다. 물가 불안 등의 부작용을 피하면서도 정부 지출을 늘릴 수 있는 영역으로 ‘공공 일자리 부문’을 콕 짚기도 한다. 시장 자율로 달성되기 어려운 완전고용을 공무원 등 공공기관 종사자의 고용을 확대하기 위한 정부 지출로 이룰 수 있다고 엠엠티 진영은 강조한다.

경기 침체기에 위축된 민간 수요를 끌어올리기 위해 정부가 재정 지출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과 그 실천은 꾸준히 존재해왔다. 케인스를 따르는 경제학자들(케인지언)이 그들이다. 엠엠티 진영이 케인지언들의 주장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으면서도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케인지언은 경기 위축기에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 지출을 확대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세입과 세출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나 엠엠티 진영은 이마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언뜻 무책임해 보이는 이런 주장의 바탕을 이루는 엠엠티는 그 깊이가 얕지 않다. 엠엠티는 ‘화폐란 무엇인가’란 고민에서 시작된다. 주장의 뿌리가 매우 근본적인 데서 출발한다는 뜻이다. 이들은 현대 화폐는 상품과 서비스의 교환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정부가 세금을 걷기 위해 강제하는 명령화폐(Fiat Money)라 본다. 본디 화폐는 정부의 강제력을 기반으로 하기에 정부가 얼마든지 발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명령화폐를 부정하며 등장한 비트코인 같은 가상통화에 엠엠티 진영이 “바보들을 속이는 데에 사용되는 도구일 뿐”이라고 혹평하는 건 이래서 자연스럽다.

김경락 기자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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