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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그래 더 큰 고통을 가지고 와, 내 사랑

등록 2018-04-26 20:23수정 2018-04-27 01:38

가난·성폭력·신경증·사랑의 트라우마
특출한 시적 재능으로 허물어뜨린
여성 시인 박서원의 문학적 부활

박서원 시전집
박서원 지음/최측의농간·2만3000원

허무는 힘. 고통을 허물어뜨리는 이런 허무의 힘이 또 있을까, 한국어로 쓰인 시에.

박서원이라는 시인이 있었다. 1960년생 여성. 시를 배운 적도, 습작한 적도 없던 스물아홉에 “누가 시라고 하는 것을 주어서 읽어보았는데 이런 것을 나도 쓸 수 있겠다 싶어서 썼”다가 등단했다. 타고난 시재가 강렬하고 낭자했다. 그의 초기 시를 편집했던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당시 “꽃들이 피를 흘리며 만발한 것 같다”고 썼다.

시인은 평생 가난했다. 유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족이 따로 살아야 했다. 10대에 성폭력 피해자가 되었다. 발작과 마비, 기면증(졸음증)이 덮쳤다. 평생 아팠다. 스물두 살 연상인 교수와 불륜이라 불릴 수도 있는 사랑을 했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이혼했다. 언어적 재능만큼 파란곡절도 비범했던, 젊고 가난한 여성 시인. 세상은 그를 거의 완벽하게 잊었다. 1999년 문화관광부 ‘오늘의 예술가상’을 받기도 한 시인은 ‘저작권 위임장’을 남겨놓고 2012년 5월 세상을 떠났지만 문단과 언론 모두 5년이 흐른 뒤에야 그의 부재를 알아차렸다.

“한국어가 답사했던 가장 어둡고 가장 황홀했던 길의 기록으로 기억되어야 마땅하다”(황현산)고 평가받는 박서원의 시가 전집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는 난간이 두렵지 않다/ 벚꽃처럼 난간을 뛰어넘는 법을/ 아는 고양이/ 그가 두려워하는 건 바로 그 묘기의/ 명수인 발과 발톱/ 냄새를 잘 맡는 예민한 코 (…) 고양이는 난간에 섰을 때/ 가장 위대한 힘이 솟구침을 안다”(‘난간 위의 고양이’) 두 세계를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은 연하고 약한 꽃 같은 존재뿐이라, 박서원은 삶과 죽음의 난간(경계)에 서서 시심을 다시 솟구친다.

생전 박서원 시인이 자전에세이 <천 년의 겨울을 건너온 여자>(1998, 동아일보사) 일본어판 출간 기념행사 참석차 도쿄를 방문한 모습. 40대 초중반 시절로 추정된다. 박 시인 유족, 최측의농간 제공
생전 박서원 시인이 자전에세이 <천 년의 겨울을 건너온 여자>(1998, 동아일보사) 일본어판 출간 기념행사 참석차 도쿄를 방문한 모습. 40대 초중반 시절로 추정된다. 박 시인 유족, 최측의농간 제공

“별들을 찬란하다고 합디다/ 묵묵히 쌓여진 계단의 먼지들은/ 바람결에 바다로 흘러가/ 물고기의 먹이가 되지요/ 역시 찬란하지 않습니까 (…) 부서지면서 우리를 살리고 발가락을 애무하는 모래 알갱이들/ 찬사만 받아왔던 저 별들/ 똑같은 시원에서 지금의 이 길 끝까지/ 누가 진정한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까”(‘저 별들에게 차마’)

육체적, 정신적, 성적 고통은 일상에 끝도 없이 지진을 일으킨다. 그 불안한 진동에 조율된 사람치고, 너무 차분하고 우아하지 않은가. 빛나는 별도 실은 모래 같은 먼지일 뿐이라면, 삶이 시시하고 허무하게 여겨진다 해도 까짓 위태로울 것도 없다는 역설적인 안도가 모든 고통을 허물어뜨리는 세계. 시인 김소연은 “박서원의 시를 제외하면, 감히 나는 모든 시는 엄살에 가까울 뿐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박서원은 모든 두려움과 고통에 대하여 흔쾌하다. 그런데 흔쾌함을 자랑하지 않아서 더없이 고요하고 아름답다”고 쓴 적이 있다. 박서원이 받은, 모질도록 아름다운 시의 ‘부름’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래, 더 큰 고통을 가지고 와. 내 사랑”(소명·1)

<박서원 시전집>은 ‘다시 읽힐 가치’가 있는 절판도서를 복간하는 출판사 ‘최측의농간’이 수소문 끝에 만난 유족과 협의를 거쳐 전체 시집 다섯 권을 한데 모은 것이다. <아무도 없어요>(1990) <난간 위의 고양이>(1995) <이 완벽한 세계>(1997) <내 기억 속의 빈 마음으로 사랑하는 당신>(1998) <모두 깨어 있는 밤>(2002)이 그것. 신동혁 최측의농간 대표는 26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사회적으로 사망선고조차 허락되지 않은 한 비범한 예술가가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이 아니라) 외모, 사생활, 신경병 따위를 두고 과장되거나 왜곡된 뒷말을 수군거리던 시절이 있었으나, 더 이상 누구도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게 된 시절이 오래 지속되었음을 알리고 추모의 물결을 일으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시인은 생전에 모든 원고를 스스로 폐기했다고 한다. 초고, 육필 원고, 부속 원고, 미발표 시 등을 일절 남기지 않은 셈이다. 이 책은 각 시집의 초판을 저본 삼았다. 신 대표는 “평생 그를 따라다닌 ‘작품 외 요소’가 아니라 작품만 두드러지도록 편집했다. 특히 그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시인으로서 삶에 큰 족쇄였다. 그래서 얼굴사진도 넣지 않았다. 유족분들도 그 뜻을 헤아려주셨다. 전집이지만 한 권(총 515쪽)에 시를 집중시켜 묶었고, 출판사 코멘트나 추천사 등 부속 내용도 배제했다”고 복간 과정을 설명했다.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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