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페테르부르크의 대가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문학동네(2018) 존 쿳시의 소설 <페테르부르크의 대가>에서, 빚 때문에 드레스덴으로 도망쳐 있던 도스토옙스키는 외아들 파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파벨이 묵던 하숙집 여주인 안나는 도스토옙스키에게 말한다. “그는 좋은 젊은이였어요.” 하지만 ‘였어요’가 문제다. 그는 아들의 죽음은 자신의 죽음이고 좋은 시절은 끝났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순간에 아들은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정말로 죽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불렀을 것이다. 그것만이 이 세상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후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돈을 너무 많이 쓴다고 나무랐었다. 그걸 썼다는 것이 굴욕이다.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그날이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한밤중, 아들의 하숙방에 누워있던 도스토옙스키는 무슨 소리를 듣는다. 규칙적이고 애원하는 듯한, 혹시 아들의 신호일까? 아니다. 개 짖는 소리였다. 그는 더러운 골목에서 쇠줄에 묶인 개를 발견한다. 그는 개를 풀어주지는 않지만 쓰다듬어준다. 그러나 갑자기 몸을 돌려 돌아온다. 개의 쓸쓸한 울음소리가 그를 따라온다. 파벨은 말이 없지만 뭔가 말을 한다면 ‘가장 사소한 것을 소중히 여기시오’라고 했을까? 그 가장 사소한 것이 추운 날씨에 버림받은 개를 의미할까? 그 개의 목줄을 풀고 집으로 데려와 먹이를 주고 소중히 돌봐줬어야 했던 걸까? 하지만 그건 내 아들이 아니다. 그냥 개일 뿐이다. 그 개가 나와 무슨 상관인가? 그러나 그렇게 묻는 순간에도 답을 알고 있다. 그가 개를 풀어주고 혹은 가장 사소한 것을 데려올 때까지 파벨이 구원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럴 때조차 확실히 구원받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아들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왜 나일까? 왜 내가 온 세상의 짐을 짊어져야 해?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이제 고통받는 눈을 외면하지 못하고 들여다보리라는 것을. 출판사에서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존 쿳시는 ‘도스토옙스키, 그는 어떻게 세계의 역작을 탄생시켰는가? 그 근원을 탐색하고자 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질문을 바꿔보고 싶다. 사람은 처절한 고통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질문이 어떻든 단서는 바로 위의 문장, ‘왜 나일까? 왜 내가 온 세상의 짐을 짊어져야 해?'와 관련이 있다. 삶은 가난, 간질, 아내와 아이의 죽음, 끝없이 고통스러웠지만, 그에게는 그 짐을 피하려는 열정이 아니라 자신의 짐만으로도 무거운데 다른 가난하고 비참한 전 인류의 짐을 짊어지려는 열정이 있었다. 그에게는 그것이 보이고 들리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피눈물로부터 온 인류를 위한 미래의 인간형을 만들려고 했다. 그는 피눈물을 흘리지만 부드럽게 말한다. ‘아이야, 러시아에서 너는 고운 꽃이 될 여유가 없다. 러시아에서 너는 우엉이나 민들레가 되어야 해.’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는 어두운 시절을 통과해서 대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이 겪은 일로 삶과 타인을 이해하면서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영혼은 변함없이 혼란이고 모순이고 경멸할 만한 것이지만 매우 고귀하고 심오한 것일 수 있다. 소설에서 그는 진실한 말은 어디 있는가? 라고 묻는다. 그 진실한 말은 이렇게 주어진다. ‘우리는 풍요로움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괴로움과 부족함으로 글을 쓴다.’ 정혜윤(시비에스) 피디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문학동네(2018) 존 쿳시의 소설 <페테르부르크의 대가>에서, 빚 때문에 드레스덴으로 도망쳐 있던 도스토옙스키는 외아들 파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파벨이 묵던 하숙집 여주인 안나는 도스토옙스키에게 말한다. “그는 좋은 젊은이였어요.” 하지만 ‘였어요’가 문제다. 그는 아들의 죽음은 자신의 죽음이고 좋은 시절은 끝났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순간에 아들은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정말로 죽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불렀을 것이다. 그것만이 이 세상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후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돈을 너무 많이 쓴다고 나무랐었다. 그걸 썼다는 것이 굴욕이다.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그날이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한밤중, 아들의 하숙방에 누워있던 도스토옙스키는 무슨 소리를 듣는다. 규칙적이고 애원하는 듯한, 혹시 아들의 신호일까? 아니다. 개 짖는 소리였다. 그는 더러운 골목에서 쇠줄에 묶인 개를 발견한다. 그는 개를 풀어주지는 않지만 쓰다듬어준다. 그러나 갑자기 몸을 돌려 돌아온다. 개의 쓸쓸한 울음소리가 그를 따라온다. 파벨은 말이 없지만 뭔가 말을 한다면 ‘가장 사소한 것을 소중히 여기시오’라고 했을까? 그 가장 사소한 것이 추운 날씨에 버림받은 개를 의미할까? 그 개의 목줄을 풀고 집으로 데려와 먹이를 주고 소중히 돌봐줬어야 했던 걸까? 하지만 그건 내 아들이 아니다. 그냥 개일 뿐이다. 그 개가 나와 무슨 상관인가? 그러나 그렇게 묻는 순간에도 답을 알고 있다. 그가 개를 풀어주고 혹은 가장 사소한 것을 데려올 때까지 파벨이 구원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럴 때조차 확실히 구원받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아들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왜 나일까? 왜 내가 온 세상의 짐을 짊어져야 해?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이제 고통받는 눈을 외면하지 못하고 들여다보리라는 것을. 출판사에서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존 쿳시는 ‘도스토옙스키, 그는 어떻게 세계의 역작을 탄생시켰는가? 그 근원을 탐색하고자 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질문을 바꿔보고 싶다. 사람은 처절한 고통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질문이 어떻든 단서는 바로 위의 문장, ‘왜 나일까? 왜 내가 온 세상의 짐을 짊어져야 해?'와 관련이 있다. 삶은 가난, 간질, 아내와 아이의 죽음, 끝없이 고통스러웠지만, 그에게는 그 짐을 피하려는 열정이 아니라 자신의 짐만으로도 무거운데 다른 가난하고 비참한 전 인류의 짐을 짊어지려는 열정이 있었다. 그에게는 그것이 보이고 들리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피눈물로부터 온 인류를 위한 미래의 인간형을 만들려고 했다. 그는 피눈물을 흘리지만 부드럽게 말한다. ‘아이야, 러시아에서 너는 고운 꽃이 될 여유가 없다. 러시아에서 너는 우엉이나 민들레가 되어야 해.’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는 어두운 시절을 통과해서 대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이 겪은 일로 삶과 타인을 이해하면서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영혼은 변함없이 혼란이고 모순이고 경멸할 만한 것이지만 매우 고귀하고 심오한 것일 수 있다. 소설에서 그는 진실한 말은 어디 있는가? 라고 묻는다. 그 진실한 말은 이렇게 주어진다. ‘우리는 풍요로움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괴로움과 부족함으로 글을 쓴다.’ 정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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