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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아무도 돌보지 않는 농촌과 농민의 삶을 호명하다

등록 2018-06-07 19:55수정 2018-06-07 20:46

김종광 연작소설집 ‘놀러 가자고요’
고향 ‘범골’ 부모님과 이웃들 이야기
특유의 해학과 입말 속 애환 깃들어

놀러 가자고요
김종광 지음/작가정신·1만3000원

김종광의 소설집 <놀러 가자고요>는 그의 고향을 모델로 삼은 ‘범골’의 인문지리지처럼 읽힌다. 책에 실린 아홉 단편 거의가 범골 사람들 또는 그 자식들 이야기를 담았다. 작가 자신의 가탁일 소설가 ‘소판돈’의 부모 ‘김사또’와 ‘오지랖’을 중심으로, 범골에 살거나 그곳 출신인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져 당대 농촌 현실을 부조해 낸다. 각 단편은 서로 다른 주인공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지만, 한 작품에서 주연으로 부각됐던 이가 다른 작품에서는 조연으로 스쳐 지나가는 식으로, 작품들은 서로 긴밀히 얽혀 있다.

수록작 가운데 ‘<범골사> 해설’이라는 작품은 독특한 형식으로 눈길을 끈다. 외지 출신으로 범골에 정착한 ‘성염구’가 120년 범골의 역사를 정리한 책 <범골사>를 쓰면서 참조했던 자료들의 목록과 그에 대한 짧은 해제를 열거했다. 이 가운데 범골 출신 “듣보잡 소설가” 소판돈에 관한 언급이 특히 흥미로운데, 이러하다.

“성염구가 (소판돈의 소설) <별의별>을 짯짯이 훑으니 소판돈은 왜곡을 넘어 날조를 하고 있었다. 이러니 소설가 놈들이 욕을 먹어 마땅하다! 순 거짓말 제조기라니까. (…) 소판돈의 소설을 읽자 거짓에 맞서 진실을 밝히자는 투쟁의지 같은 것이 막 샘솟아 술기운을 빌려 집필에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술술 잘 써지는 것이었다.”

성염구의 품평이 문학과 소설에 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그가 ‘왜곡’과 ‘날조’라 파악한 허구의 틀을 빌려 고향 범골과 부모 세대의 삶을 천착하는 소판돈(그러니까 김종광)의 각오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설명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지루하고 사소한 농민으로서의 삶을 경이롭고 기억할 만한 사건의 연속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

‘범골’ 연작소설집 <놀러 가자고요>를 낸 소설가 김종광. “변명을 하자면, 내 부모의 인생이 기록되어야만 하는 귀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줄기차게 썼다”고 ‘작가의 말’에서 밝혔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범골’ 연작소설집 <놀러 가자고요>를 낸 소설가 김종광. “변명을 하자면, 내 부모의 인생이 기록되어야만 하는 귀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줄기차게 썼다”고 ‘작가의 말’에서 밝혔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1998년 등단해 올해로 만 20년을 채웠으며 누구보다 부지런히 소설을 써 왔음에도 김종광이 문단 안팎의 영광과 환호에서 비껴서 있어야 했던 사정이 이로써 조금 설명되지 않겠는가. 1960, 70년대 한국 사회를 휩쓴 이촌향도 바람처럼, 적어도 90년대 이후 한국의 주류 소설에서 농촌과 농민의 삶은 회피와 외면의 대상이었다. 엄연히 거기 있음에도 없는 존재 취급. 성가시고 부끄러워 떼쳐 버리고픈, 못난 친척 같았다고나 할까. 김종광은, 선배 이시백과 함께, 그렇게 남들이 돌아보지 않는 농촌과 농민의 삶을 문학의 이름으로 호명해 온 드문 작가다.

또 다른 수록작 ‘범골 달인 열전’은 그런 김종광의 소설적 고집과 문학관을 잘 구현한 것으로 보인다. 전설적인 11대 1 모심기 대결에서 이긴 모심기 달인 ‘모심지’, 트랙터를 몰고 가 도랑에 빠진 차들을 빼내주곤 하는 ‘김견인’, 마늘 까는 부업에서 남다른 속도와 정확성을 자랑하는 ‘마늘댁’ 등 여기 소개된 달인들의 재주란 그닥 놀랍거나 신기할 것이 없는 유의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보잘것없는 재주와 그 주인들의 이름을 불러 주고 그들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야말로 김종광이 가장 애정을 지니고 잘 할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그 잡스러운 도랑길에 뿌리를 내리고 막 솟아 나온 놈, 낮게 엎드려 이파리 푸르뎅뎅한 놈, 잘났다고 짙푸르게 발딱 선 놈, 잡초라 싸잡기에 어울리도록 무성한 놈, 냄새나는 꽃 매단 놈, 성질 급하게 벌써 꽃가루 날리고 시들어가는 놈, 다종다양하게 뻗어 있었다.”

‘봇도랑 치기’에서, 흙더미와 쓰레기로 메꿔진 봇도랑에 돋아난 잡초들을 묘사한 문장이다. 판소리 사설을 닮은 이런 열거투 문장은 묘한 활력과 웃음을 선사한다. 고향 보령 선배인 이문구를 연상시키는, 의뭉스러운 충청도 입말의 향연 역시 김종광 득의의 지점이다. 노인회장인 남편을 대신해 마을 주민들에게 놀러 가자는 전화를 돌리는 오지랖댁의 통화만으로 이루어진 표제작, 그리고 노인회장이 된 김사또가 지역 신문과 행한 인터뷰를 담은 ‘김사또’의 한 대목이 대표적이다. 돈 안 되는 농사에 절망하고, 구제역에 노심초사하며, 쉰살 된 노총각이 술김에 농약을 들이켜는 농촌의 음울한 현실은 기조음처럼 저변에 깔린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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