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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우리의 킥은 우아하게 ‘맨스플레인’을 넘어가지”

등록 2018-06-14 19:35수정 2018-06-14 21:12

‘체육소녀’의 축구사랑 에세이
아마추어 여자축구팀 3년 동안
‘기울어진 운동장’ 뛰면서 겪은
“기절하게” 재밌고 깊은 메시지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한 팀이 된 여자들, 피치에 서다
김혼비 지음/민음사·1만4800원

일단 재밌다. 축구 말이다. 공을 차는 것도, 경기 보며 흥분해 소리 지르는 것도 재밌다. 승패가 갈리면 한쪽은 로켓처럼 치솟고 다른 한쪽은 푹 꺼지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스포츠는 살아 있다.’ 경기 뒤 떠들썩하게 들이켜는 시원한 맥주도 빼놓으면 섭섭하다. 남자들 사이에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나오면 말 다했다.

여자들도 축구를 좋아할까? 바보 같은 질문이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는 “기절할 만큼 축구를 좋아하는” 서른일곱살 여성 김혼비가 들려주는, 유쾌하고 박진감 넘치는 ‘여자 축구’ 이야기다. “축구 하면 우악스러움에 가까운 억셈이 떠오르고, 특히 한국에서 축구라는 운동에는 어쩐지 ‘아저씨 냄새’ 같은 게 배어 있다”지만, 그래도 “세상에는 축구를 하는 여자들이 많이 있다.” 김…혼비? 축구 마니아들에겐 낯익은 이름이다. 영국 소설가이자 열혈 축구팬이 쓴 축구 에세이 <피버 피치>의 작가가 닉 혼비다. 김혼비는 그의 이름을 딴 필명이다. 그는 책이라는 그라운드에서 맛깔스런 글솜씨를 축구공 삼아 “여자가 남자와 똑같은 이유로 축구와 축구 선수를 좋아할 거라곤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경쾌한 드리블과 페이크와 정면돌파로 짜릿한 슈팅을 날린다. 김혼비는 중고교 시절에도 “틈만 나면 운동장에 나가 땀이 뒤범벅이 되도록” 농구와 배구를 한 ‘체육소녀’였다. 덕분에 오후 수업엔 많이 졸았는데 “선생님이 나를 AM 김혼비, PM 김혼비로 나눠서 부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축구도 직접 뛰고 싶었다. 그런데 “공을 가지고 노는 시간이면 선생님은 어김없이 남자들에게는 축구, 여자들에게는 발야구나 피구를 시켰다.” 어른이 돼서도 직접 축구를 할 기회는 좀체 찾아보기 어려웠다.

자신의 축구동호회 경험을 엮은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낸 김혼비(필명)씨가 13일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면서 축구공을 들어 보이고 있다. 그는 ‘좁은’ 아마추어 축구커뮤니티에서 아직은 자신이 이 책의 저자라는 사실이 팀 동료들 말고는 알려지는 걸 원치 않는다고 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자신의 축구동호회 경험을 엮은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낸 김혼비(필명)씨가 13일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면서 축구공을 들어 보이고 있다. 그는 ‘좁은’ 아마추어 축구커뮤니티에서 아직은 자신이 이 책의 저자라는 사실이 팀 동료들 말고는 알려지는 걸 원치 않는다고 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13일 인터뷰를 위해 한겨레신문사를 찾은 그는 “대학 졸업 뒤 회사에 취직하고 나서는 꼬박 10년을 유럽과 홍콩 등 해외 지사만 돌다가 2013년에 한국에 들어오면서 다시 축구 열병이 왔다”고 말했다. 틈틈이 인터넷을 뒤진 지 2년 만에 드디어 “초보자도 환영”이라는 여자축구팀 회원 모집 공고를 봤다. “덜컥 전화부터 했”는데 “수화기 너머의 남자, 그러니까 내가 나중에 감독님이라고 부르게 될 이 사람은 자꾸 ‘일단’ 와 보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일단’ 지원부터 하고 나서 마음의 준비를 할 속셈이었는데 합격이고 뭐고 당장 며칠 후 훈련부터 합류하라고 했다.” 그렇게 엉겁결에 축구팀 일원이 됐고, “입단한 지 1시간 10분 만에 느닷없이(…) 빛나는 데뷔전”을 치렀다.

자신의 축구동호회 경험을 엮은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낸 김혼비(필명)씨가 13일 <한겨레>와 인터뷰에 앞서 축구공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자신의 축구동호회 경험을 엮은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낸 김혼비(필명)씨가 13일 <한겨레>와 인터뷰에 앞서 축구공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이후 그는 틈틈이 ‘축구 일기’를 썼고 이번에 책으로 엮어 펴냈다. 그는 평소에도 책읽기와 영화 감상을 즐기고 글을 써왔으며, 대학원에 진학해 제3세계 관광경영이 1세계 거대 자본의 논리로 왜곡되는 문제점을 공부하기도 했다. 시합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을 바로 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한 묘사를 읽다보면 곳곳에서 ‘킥킥’ 웃음이 터지거나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반면 감동적이고 때론 울컥해지는 대목도 많다. 책 자체가 ‘여자’ 축구 이야기, 더 정확히는 축구를 좋아하는 ‘여성’들이 남성·연장자 중심의 위계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한 팀을 이뤄 뛰면서 체험하고 깨닫고 맞서는 이야기여서다.

책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빼면 모두 15개의 이야기가 실렸는데, ‘로빙슛: 맨스플레인 vs 우먼스플레이’는 특히 재밌다. ‘맨스플레인(mansplain)’은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의 조합어로, 리베카 솔닛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책에서 쓰면서 널리 알려졌다. 맨스플레인은 축구장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시니어팀 할아버지부터 초등학생까지 여자 선수들에겐 꼭 말을 걸고 뭔가를 가르치려 든다. 초면의 4, 50대 남자팀과 연습시합을 하던 날도 그랬다. 전반에 여자팀에게 한 골을 먹은 상대팀이 하프타임 때 멋쩍음을 애써 감추며 실없는 농담을 던지자 주장이 한마디 쏘아붙였다. “아저씨들, 후반 끝나고도 슬슬 뛰었다는 둥 구차한 말 마시고 제대로들 뛰세요, 네? 체면은 살려드릴게.”

2014년 9월 인천 문학경기장 축구장에서 열린 2014 인천아시안게임 여자축구 한국과 북한의 4강전에서 한국 대표선수 지소연(맨왼쪽)이 상대 수비 돌파를 시도하고 있다. 인천/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2014년 9월 인천 문학경기장 축구장에서 열린 2014 인천아시안게임 여자축구 한국과 북한의 4강전에서 한국 대표선수 지소연(맨왼쪽)이 상대 수비 돌파를 시도하고 있다. 인천/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썰렁해진 분위기는 후반전에 확 달아올랐다. 여자팀 주전선수들이 현란한 개인기로 상대 선수들을 약 올리고 따돌린 뒤 “완벽한 로빙슛(공의 밑동을 톡 찍어 차서 골키퍼의 키를 살짝 넘기는 높고 느린 슛)”으로 3골이나 추가 골을 넣어버린 것. “그날 이후 회사나 일상에서 맨스플레인 하려 드는 남자들을 볼 때마다 주장의 슛이 떠올랐다. 살면서 본 가장 의미 심장한 슛이 아니었을까? 거기에 담긴 메시지는 매우 명확했다. ‘나의 킥은 느리고 우아하게 너희들의 ‘코칭’을 넘어가지.’ 느리고 우아하고 통쾌했던, 잊지 못할 로빙슛! 러빙슛!”

김혼비는 “축구는 매우 지능적인 경기여서 매력적”이라고 했다. “야구가 복잡하고 정교한 룰(규칙)과 기승전결 구조를 갖춘 소설이라면, 축구는 룰이 단순해서 오히려 열려 있는, 적극적으로 의미를 찾아 읽어야 하는 텍스트 같아요.” 그는 운동장에서 세상 이치도 깨닫는다. “첨엔 바쁘게 공만 따라다니다가 어느 순간 패스가 보여요. 점이 선이 되는 거죠. 그 다음엔 선들이 모여 공간을 만들어요. 축구는 공간 싸움이잖아요. 경기를 보는 편차도 커요. 어떤 사람은 직전까지 상황을 30초만 보지만, 또 어떤 사람은 3분을 리플레이(다시 보기)하고 맥락을 이해하죠.”

2017년 12월 일본 지바현 소가스포츠파크에서 열린 ‘2017 동아시아축구연맹 E-1 풋볼 챔피언십’ 여자부 한국과 북한의 2차전 경기에서 북한의 김윤미(빨간 유니폼)가 골을 터뜨리고 있다. 지바/연합뉴스
2017년 12월 일본 지바현 소가스포츠파크에서 열린 ‘2017 동아시아축구연맹 E-1 풋볼 챔피언십’ 여자부 한국과 북한의 2차전 경기에서 북한의 김윤미(빨간 유니폼)가 골을 터뜨리고 있다. 지바/연합뉴스

운동장은 성별과 나이가 계급장인 우리 사회의 축약판이기도 했다. 우선, 아마추어 여자 축구팀은 “전국 곳곳에 아주 많다”(세상의 절반이 여성이다).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연령대가 40~50대라는 사실도 흥미로운데, 이는 그제서야 “출산과 육아에서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육아와 가사는 아직도 여성 부담이다). 시니어(60대 이상 남성)팀과의 연습경기에서 김혼비의 철저한 마크에 막힌 6번 할아버지는 “왜 자꾸 나를 막아? 내가 쟤보다 만만해 보이냐?” 역정을 내다가, 급기야는 “넌 이따구로 축구하다간 조만간 다리 한 짝이 분질러질 것”이라고 저주를 퍼붓는다. “주말에 남편 점심은 어떡하느냐”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건 “세상이 구획해놓은 영역과의 신경전”이나 다름 없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운동이 (사회적) ‘운동’이 되는 순간”이다.

김혼비가 에필로그에 덧붙인 말이 축구공처럼 튀며 울림을 준다. “일상에서 개인이 편견에 맞서 할 수 있는 운동이란 건 결국 편견의 가짓수를 줄여가는 싸움이 아닐까.(…) 세상에 축구하는 여자들이 한 팀이라도 더 있으면 좋겠다. 원래 운동은 머릿수가 많을수록 힘이 붙는 법이니까.”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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