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누군가의 꿈이 되고 싶다

등록 2018-07-05 19:39수정 2018-07-05 20:05

[책과 생각]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말의 정의
오에 겐자부로 지음, 송태욱 옮김/뮤진트리(2018)

한국과 독일의 월드컵을 보고 ‘이제 그만 자야지’ 돌아서다가 조현우 선수의 인터뷰를 듣게 되었다. 조현우 선수의 인터뷰는 거두절미하고 이렇게 시작되었다. “저는 누군가의 꿈이 되고 싶습니다.” 돌아서는 나의 뒤통수가 서늘해졌다. 이 시점에서 말하기 상당히 겸연쩍지만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나의 꿈도 바로 그것이다. 나도 누군가의 꿈이 되고 싶다.

우리 라디오 시사 피디들이 하루 중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누구 없어?”다. “누가 방송에 나와서 말 좀 해줄 수 있어?” 우리는 늘 사람을 찾고 기다린다. 우리가 찾던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이 하루 중 일어난 가장 좋은 일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고유성 때문에, 진지한 열정과 꿈 때문에 산다. 그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서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남들의 삶에 신세만 지면서 살다보니 나도 한번은 누군가에는 꼭 필요한 사람, 찾던 사람, 기다리던 사람, 존재 자체로 믿을 수 없이 기쁜 사람, 꿈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내심 결심을 한 것이 벌써 몇년 전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오에 겐자부로 <말의 정의> 개정판을 읽으니 몇년 전 초역을 읽던 시절, 마음을 사로잡았던 부분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오에의 첫 아이가 머리에 커다란 기형을 가진 채 태어났다. 갓난아이를 병원에 놔둔 채 오에는 히로시마에서 열린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 갔다. 그곳에서 스스로 피폭을 당하면서 피폭자 치료에 전념했던 원폭병원장 시게토 후미오를 만난다. 오에는 그 모습을 보고 처음으로 아들의 문제를 정면으로 받아들일 용기를 얻어 아이를 셋방으로 데리고 왔다. 내게도 시게토 선생의 이야기는 크게 다가왔다. 현실에서도 그런 모습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해고 노동자가 해고 노동자를 돌보고, 슬픈 사람이 슬픈 사람을 돌보고, 재난 참사 피해자가 다른 재난 참사 피해자를 돌보는 것을 보면서 큰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오에와 특별히 가까웠던 처남이 자살을 하고 만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를 위해 뉴욕에서 ‘어려운 시기를 위한 시디(CD) 목록’을 보내준다. 오에는 사이드가 경이적으로 아름다운 곡이라고 칭했던 모차르트의 오페라 <코지 판 투테>를 반복적으로 듣는다. 사이드는 <코지 판 투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모차르트가 이 오페라를 작곡하던 시기는 프랑스 혁명기. 작품 속 인간은 각각 위기감을 가지고 있고 안정성이 없고 모차르트 자신도 죽고 싶은 마음을 아버지께 편지로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음악이 시작되면 “우리는 절망에도 헤매지 않고 그저 모차르트의 엄격한 음악적 통제를 좇아가는 것밖에 할 수 없다.”

그 다음에 내가 가장 좋아했던 문장이 이어진다. “제가 서고에 틀어박혀 지나간 일과 미래를 생각한 후 그럭저럭 회복을 한 것은 젊었을 때부터 천재적인 지기를 얻었다, 그것은 행운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어린아이의 심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강하고 깊이 성숙해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커다란 붕괴감과 그들과 함께 살았단 느낌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시디 목록을 만들어 보낸 사이드의 마음도 그것을 반복적으로 듣는 오에의 마음도, 심지어 모차르트의 마음도 그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 않는다. 어떤 꿈은 깨고 나면 경멸해서 버리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이런 꿈은, 누군가 좌절과 슬픔의 장막을 걷고 다시 앞으로 한 걸음 나가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꿈은 결코 그렇지 않다.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번잡한 일상 내려놓은 대도시의 매력 찾아…하루짜리 서울 여행 1.

번잡한 일상 내려놓은 대도시의 매력 찾아…하루짜리 서울 여행

벽돌로 쌓은 제따와나 선원, 석가모니 따라 수행이 즐거운 집 2.

벽돌로 쌓은 제따와나 선원, 석가모니 따라 수행이 즐거운 집

검은 물살 타고 대마도 밀려 간 제주 사람들 3.

검은 물살 타고 대마도 밀려 간 제주 사람들

경복궁 주변 파봤더니 고려시대 유물이 줄줄이? 4.

경복궁 주변 파봤더니 고려시대 유물이 줄줄이?

신라 맹꽁이의 1300년 전 미소를 보라..설연휴 박물관 나들이 전시 5.

신라 맹꽁이의 1300년 전 미소를 보라..설연휴 박물관 나들이 전시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