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
-한국인 유일의 단독 방북 취재
진천규 글·사진/타커스·2만원
한국인 대다수는 북한 사람들의 삶을 잘 모른다. 냉전 대립과 정보 제한, 편견과 무관심, 극우반북 미디어의 왜곡 등 여러 이유가 있을 터이다. 오죽하면 작가 황석영이 1989년 방북했다가 돌아와 수감 중에 쓴 글들을 모은 에세이집에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1993)란 제목을 붙였을까. 지난 4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1년 만에 세번째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한반도 평화 분위기가 급물살을 타고 있는 건 격세지감이다. 이런 참에 재미 한국 언론인이 평양의 일상을 직접 본 그대로 글과 사진으로 기록한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가 나온 것은 맞춤하고 반갑다.
북핵을 둘러싼 북미 갈등과 위기가 절정으로 치닫던 지난해 10월, 평양 시민들이 광복지구상업중심(백화점)의 식품 매대에서 아이들 간식거리를 고르고 있다. 타커스 제공
지난해 4월 북한 평양시의 대성구역과 모란봉구역에 걸쳐 완공된 려명거리의 초고층 아파트 단지. 타커스 제공
평양 거리에서 여학생들이 학교에 가고 있는 모습. 타커스 제공
300여쪽 분량의 책엔 평양의 최신 고층건물들과 거리 풍경, 시민들의 다양한 표정과 몸짓이 실린 컬러 사진들이 빼곡하다. 교외 들판엔 황금빛 곡물을 수확하는 농민들과 트랙터가 분주하다. 아침 거리는 출근길 시민과 차량들로 북적이고, 오후 하교길엔 여학생들의 재잘거림이 쏟아진다. 인민대학습당에선 영어 회화 수업이 한창이고, 옥류관 주방은 식객들의 냉면 주문을 맞추느라 후끈하다. 모란봉 공원에선 신혼 부부가 벗들과 ‘꼬리잡기 놀이’를 하며 웨딩 비디오를 찍고, 상업중심(백화점)의 식품 매대 앞에선 여성들이 꼼꼼하게 먹거리를 고른다. 당구장, 빙상장, 물놀이장엔 젊음이 넘친다. 연출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다. 지은이는 그런 모습들을 섬세하게 포착해 셔터를 누르고 펜을 들었다. 취재 지역이 평양과 그 주변에 집중된 사실을 감안해도 기존의 무지나 고정관념을 깨뜨리기에 부족하지 않다.
북한 최고의 학술·교육기관인 평양 김일성종합대학교 맞은 편에 구호를 새긴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타커스 제공
평양 시민들이 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에서 고기쟁반국수를 즐기고 있다. 타커스 제공
평양 모란봉공원에서 신랑신부와 친구들이 비디오 촬영을 위해 꼬리잡기 놀이를 하고 있다. 모란봉 공원은 신혼 부부가 결혼 사진을 찍는 필수 코스다. 타커스 제공
지은이 진천규는 <한겨레> <한겨레21> <미주 한국일보> 등에서 30년째 역사의 현장을 기록해온 베테랑 사진 기자다. 그가 1992년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과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취재 이후 17년 만인 지난해 10월 다시 찾은 평양의 첫인상은 ‘놀라움’이었다. 당시는 북한과 미국이 서로 “핵무력 건설 완성” “미국놈들이 망동을 계속 부려대면 중대한 결단”(북한), “화염과 분노” “북 핵공격 땐 지도에서 사라질 것”(미국) 같은 살벌한 말 폭탄을 주고 받던 때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평양엔 전쟁 준비 동원설과는 판이한 평온과 활력이 넘쳤다. “특히 놀란 것은 손전화·택시·마트의 일상화였다.” 이때부터 8개월 새 네 차례나 평양을 방문해, 급변하는 면모와 그곳 인민들의 일상을 맘껏 카메라에 담았다.
지난해 10월 북한 평안도 용천평야 들녘에서 농민들이 가을걷이를 하고 있다. 타커스 제공
북한 평양의 한 소학교 여학생 2명이 비오는 날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가고 있다. 타커스 제공
지은이는 취재 과정에서 “단언컨대 단 한 장의 사진이나 단 1초의 동영상도 검열이나 제지가 없었다”고 했다. 그의 말마따나 남쪽의 기자가 자유롭게 북녘의 여러 곳을 취재하고 사진을 찍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남한 언론에 대한 북쪽의 불신 탓이다. 그런데 지은이가 ‘예외’였던 것은 “북한 당국이 세 가지만 지켜달라고 부탁한 요구를 이해하고 신의를 지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상과 사진은 전체 모습이 온전히 나오게 해달라, 건설노동자를 찍지 말라(북한에서도 일명 ‘노가다’는 기피 직업이어서 군인들이 그 일을 맡는다), 등이 굽고 남루한 노인을 찍지 말라, 이게 전부였다. 지은이는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서로 약속을 지키는 것. 이 단순한 태도가 남과 북의 미래를 결정 지으며(…) 서로 가까워지고 더 많은 것을 이뤄낼 것”이란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한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