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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죽음을 상대로 거듭되는 전투가 곧 삶

등록 2018-08-09 19:13수정 2018-08-09 19:46

모든 저녁이 저물 때
예니 에르펜베크 지음, 배수아 옮김/한길사·1만4500원

“하나의 삶에는 매번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전선(戰線)이 얼마나 많은 것일까.”

동독 출신 작가 예니 에르펜베크(사진·51)의 소설 <모든 저녁이 저물 때>는 이 질문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의문문의 형태를 띤 위 문장이 사실은 감탄문에 가깝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시 말해 본다면, 이 소설은 삶을 공격하는 숱한 죽음의 전사(戰士)들을 길들이고 그들과 화해하는 과정을 그린다고 할 수도 있겠다.

소설은 1권에서 5권까지 5개 ‘권’과 각 권 사이 네 ‘막간극’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형식은 소설 내용과 긴밀하게 조응한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다섯 번 죽고 네 번 되살아난다. 1권에서 갓난아기인 주인공은 갑자기 숨이 멈춰 죽지만, 막간극에서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창문 바깥 창틀에 쌓인 눈을 한줌 퍼다가 아기 옷 속으로 밀어 넣는 ‘응급 처방’을 한 덕에 다시 숨을 쉬게 된다. 그렇게 살아난 아기가 열일곱살 나이로 1차대전이 끝난 직후 오스트리아 빈에서 생활하는 이야기가 2권을 이룬다. 물론 2권 말미에서 주인공은 다시 죽고, 막간극에서 되살아난 다음 3권에서 또다시 죽는다…. 3권은 스탈린의 철권 통치가 한창이던 1941년 모스크바를, 4권은 1960년대 초 동베를린을, 5권은 독일이 통일된 뒤인 1990년대 초 베를린을 각각 무대로 삼는다. 5권 말미에서 마지막으로, 그러니까 ‘진짜’ 죽음을 앞둔 주인공은 “나는 한 세기를 때려눕혔어”라고 아들에게 말하는데, 그렇다면 이 소설은 한 세기에 걸친 삶과 죽음의 쟁투를 다루었다고 해도 좋겠다.

“한 사람이 죽은 하루가 저문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저녁이 저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소설 제목을 낳은 이 문장은 책에 두 번 나온다. 1권에서 주인공의 외할머니가, 아기를 잃고 낙심한 딸을 보며 혼자 곱씹는 장면이 처음이다. 외손녀의 죽음을 보기 전에 일찍이 이 유대인 여성은 남편의 죽음을 겪었던 터였다. 그들이 살던 갈리시아 지방에서 주민들이 하루 아침에 표변해 유대인 이웃을 학살할 때,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안드레이를 비롯한 이웃들이 남편을 두들겨 패고 칼과 도깨로 난도질을 했던 것.

이 문장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1919년 빈을 다룬 2권에서다. 주인공은 친했던 친구가 병에 걸려 죽은 뒤 그 친구의 침대에서 친구의 애인과 동침한다. 내심 친구의 애인을 연모해 왔던 주인공이, 친구의 죽음 뒤에도 삶은 이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이 문장은 면죄부처럼 또는 알리바이처럼 그를 찾아온다.

죽은 사람이 죽지 않고 계속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상상은 공허하지만 매혹적이다. 에르펜베크는 게임에서나 가능한 상상을 소설로 펼쳐 보였다. 보르헤스 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또는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떠오르게 하는가 하면, 물리학의 평행우주론에도 생각이 미치게 한다. “모든 게 다 꾸며낸 이야기 같아.”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주인공은 이렇게 말하는데, 생사를 건 전투에서 90년 동안 연전연승 하고 나면 이런 정도의 여유와 관조도 가능해지는 것일까.

최재봉 기자, 사진 한길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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